수원 예술공간 봄
이윤숙 관장이 수원의 오래된 도심 행궁동에 대안공간 눈을 열고 동네를 벽화마을로 만들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다. 허름한 동네에서 돈이 벌리지도 않고 시간과 에너지만 들이는 그의 문화 활동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주민도 있었으나, 기금을 받고 예술가가 오고가고 동네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자 그의 비전을 높이 평가하는 주민도 생겼다. 한 주민이 집을 팔게 되자 그를 찾아서 꼭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조건은 자신이 아끼던 건물의 원형을 보존한 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달라는 것. 그렇게 2014년 예술공간 봄이 대안공간 눈 옆에 문을 열고, 수원의 문화 자생력을 키우고 있다. 바로 옆에는 오래전부터 있던 창호공방.
문래동 도시재생
문래동에 철강공장, 용접소 등 거친 기계 소리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기오염이 가속되면서 1980년대 이후 서울시의 정책으로 이전하는 공장이 늘기 시작했다. 빈 공간에 홍대 등 인근 미술대학에서 조각 등을 전공한 예술인들이 싼 임대료에 이끌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약 25년 전. 지금 문래동은 각종 장르가 어우러진 문래예술촌으로 더 유명해졌다. 군데군데 벽화가 보이고, 철로 용접한 조각도 보인다. 사진은 문래예술촌의 대표 얼굴로 잘 알려진 깡통 로봇.
당진 아미미술관
미술관은 꿈을 먹고 탄생한다. 설립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꿈의 크기도, 질도, 깊이도 달라진다. 여느 시골처럼 당진에도 폐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폐교에 한 부부작가가 정착한 것은 1990년대 말. 파리 유학중 만나 결혼한 부부는 남편의 고향 당진의 낡은 학교 건물에 현대미술을 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학을 보여주고 싶었다. 15년 넘게 매달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하고 보수해 미술관을 열었다. 소담한 시골학교는 이제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쉼터가 되었고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온다. 미술관 카페에서 잠시 차 한잔을 마셔도 좋은 곳.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015년 가을 수원에 문을 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논란과 비판을 먹고 탄생한 곳이다.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로 유명한 현대산업개발은 수원에도 대단지 아파트를 개발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수원시가 제공한 부지에 300억을 들여 미술관 건물을 짓고 시에 기부한 것이다. 조건은 바로 미술관 명칭에 있다. 공공시설을 의미하는 ‘시립’과 비즈니스 브랜드를 보여주는 ‘아이파크’라는 명칭이 공존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시민단체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세련된 건물에 좋은 전시를 열면서 사람들이 몰리자 한정된 재정을 가진 지자체의 성공한 문화사업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중국어 수요
21세기 한국문화는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중국식당, 중국어 간판, 중국어 가이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국인의 한국행 덕분에 계속 생기는 것들이다. 중국인 관광객만 오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는 중국인 학생도 다수 온다. 투자 이민을 오는 이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사람이 몰리면 세상도 변한다. 대학가 교회에 중국어 예배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정부가 종교가입에 개입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려면 낯설지 않은 모국어 예배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리빙룸 뮤지엄
쇼핑의 천국 홍콩. 홍콩의 백화점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바로 예술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이다. 타임스 스퀘어 백화점 1층 광장에 전시장을 만든 것은 2015년 초. 그러나 식상한 문화센터나 갤러리가 아니라 고급스런 ‘뮤지엄’이라는 명칭을 택했다. 집이 좁은 홍콩의 주민을 유혹하기 위해 ‘거실’을 칭하는 ‘리빙 룸’을 표방하며 마치 거실에서 편안하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듯이 전시장에 오라는 의미로 ‘리빙룸 뮤지엄’을 만들었다. 지상 광장 최고의 자리에,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을 만들어, 특이한 예술가의 작업을 전시하면서 첨단을 달리는 백화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은 마이클 라우의 전시를 하는 리빙룸 뮤지엄.
가파도의 까치집
도시의 까치들은 봄마다 전쟁이다. 산란을 위해 봄이면 집이 필요한데, 선로나 전기공급선에 집을 지었다가 한전, 코레일에서 나온 직원에게 압류당하기 쉽다. 영특한 까치는 나뭇가지 말고도 금속, 비닐 등 쓸만한 재료는 죄다 동원해서 집을 짓기 때문이다. 제주 가파도의 까치도 고민은 많다. 높은 나무가 많지 않아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적기 때문이다. 영특한 까치가 스피커 봉에 까치집을 지었다. 피뢰침 때문에 번개가 칠 수도 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일단 집이 급했는지, 지어놓고 본 것 같다.
가파도의 유토피아
제주도 남쪽 가파도는 원래 무인도였다. 조선후기부터 사람이 들어와 개간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는데 1제곱킬로미터도 안되는 작은 섬이라 아직도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섬 자체가 나지막한데다, 집들도 나지막해서 도시에 지친 사람에게 적격인 섬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문명이 있는지라 가파도의 집마당은 주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바다에서 주워온 물건, 돌을 쌓아 올리고 좋아하는 풀과 꽃을 심어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주민도 있다. 한때 낚시꾼이 손님의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4-5월의 청보리축제를 보러 오는 방문객이 넘쳐나서 잠시 유토피아가 소란스러워 지기도 한다.
제주 ICC의 벼룩시장
벼룩시장이 문화산업이 되고 있다. 문화이주자들이 몰리는 제주에서 마을마다 주말에 여는 벼룩시장은 이주민들의 교류의 장이다. 최근 제주도는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식을 개최하면서 마을벼룩시장의 상인들을 모아 컨벤션센터의 로비에 임시 장을 만들었다. 초현대식 건물의 로비에 펼쳐진 장은 소담한 마을의 장터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이 모이는 장터가 중요한 행사의 부대행사가 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결국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홍콩 ADC Art Space
최근 홍콩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정부의 홍콩예술발전위원회(HKADC)는 문화예술정책과 기금을 제공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의 후원을 받아 예술가에게 저렴한 작업실을 제공하는 것도 이 기구의 업무이다. 2014년 허름한 공장지대의 웡죽항가에 문을 연 ADC 아트 스페이스는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한 힙싱홍사의 협력으로 시장보다 싼 가격에 공간을 임대하여 젊은 예술가와 단체에 재임대하고 있다.
BMW 아트 카
1975년경부터 독일의 자동차 회사 BMW는 ‘Art Car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계적인 예술가와 협업을 하고 있다. 엘베 풀렝이라는 예술 경매사가 자동차 레이싱을 좋아한 나머지 BMW에 자신의 경주용 차를 지원하도록 설득한 후에 얻은 차에다 당대 미국의 원로작가 알렉산더 칼더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후 BMW는 여러 예술가에게 아트 카를 의뢰하면서 40년 넘게 전통을 지키고 있다. 사진은 1976년 미국의 유명 작가 프랭크 스텔라에게 의뢰한 아트 카이다.
프린지 클럽, 홍콩
비영리 예술공간을 표방하는 홍콩의 프린지 클럽. 1984년 급하게 유가공 공장이었던 식민지 시대 건물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이 프린지 페스티발을 진행하다가 눌러 앉게 된 것이다. 이후 건물을 수리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는 클럽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예술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고층 건물로 즐비한 홍콩의 센트럴 지역에 있으면서도 고풍스런 외양덕분에 주류를 거부하고 ‘주변’을 강조하는 클럽문화에 어울리는 공간이 되었다. 공연을 올리고, 이벤트 행사에 공간을 임대하고, 카페의 수익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문화예술의 도시로 부상한 홍콩의 명물로 대접받고 있다.
웨스턴 마켓, 홍콩
영국식민지 시대인 1906년 홍콩의 웨스턴 마켓에 영국 에드워드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홍콩의 역사를 담은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였으나 점차 시장은 사라지고 주변이 고층건물이 즐비한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원래의 시장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대 쇼핑몰로 개조되어 카페, 공예품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2층의 원단가게들은 원래의 시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꼭대기 층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그랜드 스테이지’가 있는데 딤섬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은 그랜드 스테이지.
홍콩 JCCAC
영국인들이 진출한 홍콩에 경마 클럽이 만들어진 것은 1841년. 홍콩 자키 클럽은 이후 경마장을 운영하며 쏠쏠한 이익을 내곤 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익의 일부를 홍콩의 문화예술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2008년 문을 연 JCCAC(자키 클럽 창의예술센터)는 홍콩 자키 클럽이 기부한 돈으로 낡은 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1990년대 봉제공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나온 공장건물의 기존 구조를 그대로 살린 채 홍콩의 문화예술인의 창작센터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현재 100개가 넘는 예술단체, 그룹, 개인 작가 등이 작업실, 공방, 가게 등을 열고 있으며 이외에도 갤러리,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은 건물의 내부모습.
맞혀 보세요.
수년 전부터 영어권에 돌아다니는 유머가 있다. 소위 ‘얼마나 빨리 다음 단어들을 맞힐 수 있나요?’이다. 정답은 매우 평범한 단어들로 질문 바로 밑에 있다. 그런데 혹시 정답과 다른 단어, 특히 성과 관련된 단어를 연상한 사람이 있을까봐, ‘you dirty minded freak!'이라고 맨 끝에 쓰고 있다. 정답과 다른 답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때문이다. 툭하고 내놓은 말과 행동은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 퀴즈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지금까지도 인터넷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가 하면, 티셔츠 등 일상용품에도 실리고 있다. 사진은 한 화장실의 문.
K11
현대 자본은 젊은 수재를 좋아한다. 패기 넘치는 젊은이가 똑똑하고 재능까지 있으면 어딘가 쓸모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30대의 한 젊은이가 2008년 홍콩에 K11이라는 쇼핑몰 브랜드를 만들었다. 애드리안 챙이 예술과 쇼핑을 결합한 ‘아트 몰’을 지향하며 문을 연지 8년. 백화점과 쇼핑몰이 경쟁하는 가운데 선택한 차별화 전략으로 성공한 그는 2011년에 ‘K11 예술 재단’을 만들어 중국현대미술을 후원하고 있다. 대대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의 후손답게 문화와 예술에 쓰는 돈의 규모도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2014년에는 현대미술계의 힘 있는 인물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사진은 홍콩의 K11의 플라자.
3개의 시간
3개의 시계가 3곳의 시간을 말해준다. 홍콩, 바젤, 마이애미의 시간이다. 이 3곳의 공통점은 ‘아트페어가 열리는 도시’이다. 1970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된 아트페어는 2002년부터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서, 그리고 2013년부터 홍콩에서도 열리고 있다. 여는 아트 페어보다 아트 바젤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수질 관리’이다. 홍콩은 3월에, 바젤에서는 6월에, 마이애미에서는 12월에 열리는데, 1년 중 쉴 새 없이 여는 미술장터는 이제 믿을 만한 투자처를 찾아 돌아다니는 자본을 흡수하는 글로벌 비즈니스가 되었다. 부동산, 주식처럼 미술에 투자하려는 부자들이라면 이 3개의 아트페어 중 한 곳에는 꼭 들리고 있다.
홍콩 아트 바젤
중국 근대사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홍콩. 그러나 자유무역항이자 무관세 정책으로 지금은 세계의 자본이 몰리는 곳 중 한곳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가장 큰 홍콩의 변화는 세계미술시장으로의 도약이다.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진출하면서 중국과 아시아의 미술을 거래하고, 홍콩 아트 바젤, 아트 센트럴 등의 아트페어가 성장하면서 홍콩을 빼고 미술시장을 논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홍콩 아트페어에 스위스의 아트 바젤이 개입하면서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 주말 열린 홍콩 아트 바젤의 전시장 모습.
이중섭 거리, 서귀포
이중섭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 평양인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평양, 원산, 부산, 통영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사망한 불운의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6.25 피난시절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던 도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중섭의 족적을 기리고 있다. 제주는 이중섭을 기리며 문화예술 활성화에 성공한 곳이다.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거리를 만들고 제주의 대표적인 예술의 거리로 성장시켰다. 특히 이 미술관이 운영하는 창작스튜디오는 무료로 1년 동안 서귀포에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어느 새 국내 예술가들 사이에 인기 있는 곳이 되었다.
명품취향
이탈리아 명품이 한국의 일상에 들어온 지도 한참 되었다. 지하철에서도 명품 가방을 든 여성들이 흔히 보일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한 브랜드의 가방은 유독 한국과 일본의 여성들이 좋아했고, 지금은 중국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특정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패턴은 곧 유사품을 낳는다. 한 버스의 의자커버도 바로 그 명품 브랜드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공공버스의 의자커버에 등장한 패턴은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명품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리얼리즘의 귀환
그림을 그릴 때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그림을 구상이라고 한다. 그런 구상회화 중에서도 사회의 현실을 드러내는 구상미술을 리얼리즘 회화라고 부른다. 예컨대, 낡은 농부의 신발을 통해서 고단한 노동을 드러낸다거나, 고개 숙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침묵 속에서 인내하는 보통 시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리얼리즘이 한국화단을 강타한 적이 있다. 이름하여 민중미술. 그런데 요즘 그런 리얼리즘 미술이 다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사동에서 열린 한 전시에 굵직한 작가들이 모여서 현실문제를 화두로 삼은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
한 예술가 공동체가 <테이크아웃 드로잉>을 만든 지 10여년이 되었다. 대학로, 성북동, 이태원 등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카페를 겸한 문화공간을 운영해 왔다. 운 좋게 얻은 이태원 가게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성공은 곧 임대료 인상과 주인의 매도로 이어졌다. 유명가수가 이 건물을 산 후 퇴거하라고 하자, 이들은 더 이상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혹여 철거명령을 이행할까봐 예술가들은 밤에도 카페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투쟁에 ‘대망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길기원, 예술가의 게임
한 예술가가 길을 가다가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흔한 의자에 대충 만든 테이블로 된 임시 ‘기원’이었다. 이 기원을 만든 사람들은 심지어 누가 의자나 테이블을 가져갈까봐 ‘길기원’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예술가가 바둑을 두는 사람들에게 새로 의자와 테이블을 사다 줄테니 지금 있는 것들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자, 의아해하면서도 허락을 했다. 예술가는 그 물건들을 전시장에 가져다가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고 그 게임장 소품으로 활용했다. 유목연 작가의 <예술가의 게임>은 그렇게 길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통해 예술로 탄생했다.
거로마을 문화공간 양
제주시 화북동은 일찍이 포구를 통해 신문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화북의 거로마을은 유학을 숭배하는 문화가 퍼지고, 예의바른 동네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본군은 마을 한 가운데로 큰 도로를 빼면서 조용한 마을을 두 동네로 갈라버렸다. 도시화가 진행된 오늘날 거로마을은 한적한 시골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동네에 할머니가 남겨주신 집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주민들과 호흡하는 이가 있다. 김범진 관장은 김연주 큐레이터와 작가를 초대하는 레지던시, 전시공간, 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오래된 마을에 온기를 지피고 있다.
윤석남의 사모곡
나이 40을 넘겨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윤석남. 가정주부로 산 삶을 뒤로 하고 그림을 배우고 전업작가로 나섰고, 1990년대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작가가 되었다. 70을 넘긴 지금까지도 윤석남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는 바로 ‘어머니’.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 어머니를 그리며 수십 년간 작업의 화두로 삼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다 못한 어머니 이야기는 한지, 구슬, 나무 등 흔한 재료로 만든 설치작업으로 탄생했다. 사진은 최근작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 IV>이다.
입춘 맞이 축제
사람의 삶이 자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 계절의 변화는 중요한 일이었다. 음역 1월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입춘을 두고 봄의 시작을 기념하곤 했다. ‘입춘대길’이라고 쓴 입춘방을 기둥이나 문에 써 붙이고 봄이 도래를 기뻐했다. 특이하게 제주도에서는 입춘에 ‘입춘굿’을 한다. 아마도 척박한 화산섬이라 무당 문화가 성행했던 전통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입춘굿이 열리면, 축하행렬이 시내 곳곳을 누비고, 행정기관이었던 관정정 앞마당에서 극과 음악을 즐기곤 했다. 사진은 올해 입춘굿의 장면.
제주의 봄
섬이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를 보고 매료되는 사람이 많다. 그중에는 조각가 박충흠도 있다. 볕이 잘 드는 산자락에 <제주 봄>을 만들어 살고 있다. 성공한 예술가로 살다가 온 서귀포에 카페, 작업실, 갤러리,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손님을 맞고 있다. 갤러리는 요청한 손님에 한해 문을 열어 주는데, 예술가가 만든 공간이어서인지 설치작품과 어두운 조명, 고즈넉한 분위기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먹고, 자고,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예술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
추사유배지, 제주
조선시대 제주는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오는 유배지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제주에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을 연마하며 빼어난 결과를 얻은 이도 있다. 학자이자 서예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렸던 추사 김정희는 1840-1849년까지 제주도 서남쪽 대정현에서 9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 그린 <세한도>는 삭풍이 부는 움막에서 고고히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다. 2010년 대정에는 건축가 승효상이 추사의 <세한도>를 해석해서 설계한 추사관이 들어서 그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사진은 기념관의 내부.
서귀포 관광극장
1963년 개관한 서귀포 관광극장은 오랫동안 서귀포의 명물이었다. 종종 누전사고가 생기면서 문을 닫은 후 방치되어 있었다. 2015년 노천극장으로 다시 태어난 이곳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서귀포시가 원 소유주에게 건물을 빌려서 리모델링한 후 지역주민협의회에 운영을 맡겼다. 이중섭 거리라는 위치도 그렇고, 오래된 건물을 재생했다는 기쁨이 배가되면서 밴드 공연,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역시 도시 재생과 활성화에는 문화예술만한 것이 없다.
서점의 진화
책을 파는 책방, 서점은 책의 진화와 맥을 같이 한다. 15세기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이후 이를 활용한 인쇄기가 보편화되면서 17세기 이후 책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인기있던 책은? 당연히 성경이었다. 이후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그 수요를 따라가기 위해 기업화되고, 특화되면서 서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서점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밝은 매장에 전시장, 독서할 수 있는 책상, 소파 등을 구비해서 책읽는 즐거움을 잊지 않게 해준다. 서귀포에 들어선 한 서점의 모습.
서촌의 변화
2000년대 들어 변모한 서울의 동네 중에서도 서촌은 독보적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허름한 동네였던 이곳은 지금 아기자기한 건물이 새로이 들어서면서 제트리피케이션이 제공하는 모든 변화를 보여준다. 서촌에서도 경복궁이 가까운 동네에 새로이 갤러리와 식당이 들어선 건물이 세워졌다. 보고 먹는 여가생활에 적절한 시설들이다. 토요일 짬이 날 때, 지하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보고, 1층의 일본식 가정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곧잘 보인다. ‘개미둥지’ 식당을 홍보하듯, 개미들이 건물을 뒤덮고 있다. 예술적 사고로 건물을 보는 주인의 여유가 돋보인다.
미드웨스트의 평원
미국 영토에서도 북부 중앙부분을 미드웨스트라고 부른다. 일리노이주를 비롯한 약 12개주에 걸쳐 펼쳐진 ‘미드웨스트’는 19세기부터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많고, 농업에서 중공업으로 변화한 산업구도를 그대로 보여기 때문이다. 옥수수, 밀, 콩 등 곡물농사로도 유명한 미드웨스트를 차로 지나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밭이 인상적이다. 신대륙의 비옥한 토양위에 자라는 곡물은 미국의 아침식사를 책임진다고도 알려져 있다.
김삿갓 마케팅
조선시대 양반가에 태어났으나 조부의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평생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았던 김병연. 지팡이에 의존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방랑시인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지 않고 마음이 닿는 대로 자유인의 삶을 산 그는 양심과 고아한 지성을 가진 신비로운 인물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 김삿갓이 등장해 상품을 홍보한다. 모든 것이 소비의 망을 벗어날 수 없는 오늘날 김삿갓의 이미지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청파동 상가
6.25를 겪고 새로 태어난 서울은 현대적인 건물이 즐비하다. 높은 고층건물이 많기는 하지만 그 사이로 낮으면서도 규모가 작은 오래된 건물도 많다. 청파동은 특히 그런 건물이 많이 보이는 곳 중 하나이다. 서울역 인근에 있어서인지 교통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고, 사람이 많아서 상가도 발달했다. 일제 시대 부터 소규모 상가건물이 많았고, 지금도 앙증맞은 가게가 즐비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테마파크의 거리를 걷는 듯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곳이다.
제주도의 돌집
제주도에 이주 열풍이 불고 있다. 작년에는 한 달 평균 1650명이 제주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례해서 새 집을 짓고, 헌 집을 고치고 있다. 사진은 이주민이 새롭게 바꾼 돌집. 원래 초가지붕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들었던 집이 1970년대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었다가 2000년대 들어 사진처럼 현대적인 집으로 바뀌고 있다. 파, 마늘이 들어섰던 텃밭은 잔디밭으로 바뀌고 예쁜 파라솔과 의자도 들어섰다. 이렇게 고친 집은 직접 거주하기도 하고 독채 펜션으로 임대해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1월의 수선화
자기 사랑과 고결함을 상징하는 수선화는 지중해에서부터 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자란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제주도와 거문도에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해마다 1월이 오면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수선화가 만개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주도에 수선화 향기가 퍼지고 있다. 카페 주인은 수선화 한 다발을 사다가 유리병에 담아 차가운 바람을 피해 온 손님을 반긴다.
피카소의 누드
1929년경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입체파 시기와 달리 형상은 원래의 인체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또한 당시 부인 올가와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성적인 부인과 달리 쾌활하면서 다혈질이었던 피카소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빨리 바뀌는 편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무너지는 결혼을 암시하듯, <안락의자의 누드> 속에 보이는 올가는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말라서 늘어진 시체처럼 표현되어 있다. 사진 속의 오른쪽 그림이다.
소파와 냉장고
프랑스 작가 베르트랑 라비에는 일상적 관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이것을 ‘증명’이라고 부르는데, 사진에 보는 것처럼 입술모양의 소파를 냉장고 위에 놓고 그 맥락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섹시할 정도로 빨간 입술모양의 소파는 원래 살바도르 달리가 1937년 여배우 매이 웨스트의 입술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소파이다. 그리고 냉장고는 유명회사 보쉬가 제작한 것인데, 라비에는 흔한 냉장고 위에 소파를 놓고 질문을 던진다. 이 둘은 어떤 관계일까?
오베르의 교회
천재 화가 반 고흐가 말년을 보낸 마을이 바로 오베르 쉬르 오아조이다. 파리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이 마을에 가세박사가 살고 있었고 그 박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1890년경 이 마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마을 곳곳을 화폭에 담곤 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13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다. 데 그는 이 교회를 배회하면서 화폭에 담곤 했는데, 구불구불한 선으로 형상을 그리는 성숙한 그의 화법을 구사했다. 현재 그의 그림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교회는 여전히 오베르 마을에 서있는데, 반 고흐의 이야기는 이 마을을 살리는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제주도의 일출
새해가 뜹니다. 구름을 제치고, 산등성이를 지나, 해가 뜹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해가 뜹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을 딛고 자연은 계속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변함없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닮아가길 빕니다.
제주 벨롱장
제주시 동쪽 바닷가 세화리에는 한 달에 2번 노천 장터가 열린다. 해변을 따라 공예품, 먹거리가 판매되는데 제주로 이주한 이주민과 토착민, 여행자가 어우러져 정감어린 시간을 보낸다. 멀리서 불빛이 반짝인다는 의미의 제주어 ‘벨롱’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아쉽게도 겨울이 되면 잠시 장을 닫게 되는데, 올해는 따뜻한 벙커에서 12월 장을 이어가고 있다. 커피 박물관 바움이 보유한 벙커에서 열리는 벨롱장, 따스한 바닷바람은 없지만, 따뜻한 사람 입김으로 채워진다.
벙커의 변신
1990년 한국통신이 만든 벙커가 제주에 있었다.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국가기반시설로 오랫동안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던 곳이다. 지하에 만들어서인지 내부는 16도 정도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제주도 동쪽에 있는 이곳을 인수한 한 커피 박물관이 벙커를 문화인들에게 오픈했다. 900평에 달하는 공간을 노래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문을 열어 닫혀있던 곳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코릿 푸드 페스티발
한국과 미식이 만나면, Korea+Eat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한국대표 레스토랑 랭킹 코릿(KOREAT)이 탄생했다. 미식전문가 100명이 맛을 따지고 고른 레스토랑들이 선정된다. ‘코릿 페스티벌’은 그 식당의 셰프들이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파는 축제로, 2015년 가을 제주에서 열렸다. 모든 음식이 1개에 5000원인데, 한 끼 식사로 배를 채우려면 3개를 구매해야 할 정도이다. 피자에서 스시, 타파스까지 싼 편이 아닌데도 고급스런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소문에 줄이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여행과 요리를 접목한 새로운 축제로 성공할 것 같다.
북한음식
평양비빔밥, 해주비빔밥, 개성장국밥. 익숙하지 않은 요리이다. 종로의 한 식당 광고에 나온 음식들로 분단의 시대에 경험할 기회가 없던 것들이라서 그런지 눈이 간다. 맛을 어떨까? 어떤 재료가 들어갈까? 언제 통일이 올지 모르고, 이산가족은 상봉할 기회도 많지 않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긴장과 공포, 그리고 아픔과, 그리움, 아쉬움을 안고 산다. 이보다 인간적일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린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서 음식으로라도 먼 곳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혼성문화
서울의 문화를 보려면 명동의 간판을 보면 된다. 서울의 쇼핑가인데도 한국어보다 중국어와 영어간판이 대다수이다. 소비자를 위해 변하는 가게들. 큰 간판들은 누가 제일 큰 고객인지 말해준다. 변하는 명동의 가게를 통해 단지 중국인과 외국인 소비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취향과 패션, 음식문화도 점점 뿌리를 내리고 한국의 음식뿐만 아니라 외국음식끼리 혼합되기도 한다. 그래서 명동은 가장 빠른 속도로 문화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자, 글로벌 시대의 소비문화의 향방을 예측할 있는 곳이다.
예술가의 위로
현대예술이 어렵다고 외면하는 사람을 위해 예술가들이 나섰다. 차를 만들어 대접하고, 요리도 해주고, 음악도 들려준다. 1990년대부터 관객의 행복과 즐거움을 꾀하고 행복한 관객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게 만드는 예술이 등장했다. 인간 사이의 관계회복을 모색하는 ‘관계미학’을 추구하는 이런 예술은 그동안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다만 예술가에게 돌아오는 것이 거의 없어서 미안할 정도이다. 한 예술가가 피로에 지친 사람에게 마사지를 제공하고 있다. 왼쪽에 앉은 작가가 마사지에 앞서서 관객에게 줄 타월(예술가가 지방 여관이나 모텔에 갈 때마다 가지고 온 것이다.)에 사인을 하고 있다.
소설 베끼기
미술관 작은 방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필기도구가 있다. 미리 온라인으로 신청한 사람이 한 명씩 그 방에 들어가 책상위에 있는 책을 그대로 공책에 베낀다. 그 책들은 카프카의 <성>, 이상의 <날개> 등 예전에 한번 읽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작가 안규철은 책이 소중했던 옛날, 병원에서 퇴근한 아버지가 의학서적을 정갈하게 베끼며 공부하던 모습을 떠올려 이 작업을 구상했다. 관람객은 집중하며 소설을 베끼고, 멀리서 다른 관객은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은 멋있게 보일 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준다.
어린이재단 기금모금
약자를 돕는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어린이 구호사업에 봉사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 사업를 이어가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매년 기금을 모아 국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이 어린이를 돕고 있다. 녹색리본을 달고 걷기대회를 하기도 하고, 사진전을 여는가 하면, 청계천에 초록우산을 매달아 후원자의 고운 마음을 알리고 있다. 올 가을에도 청계천에 걸린 초록 우산들이 걸렸다. 우산 손잡이에는 후원자의 이름을 알리는 명찰이 붙여, ‘당신도 동참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다.
늙은 예술가의 내공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만드는 워크숍, 판매대, 전시, 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되었다. 늙은 건물의 수명을 아쉬워하듯, 늙은 예술가가 등장해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의 이름은 성능경. 1970년대 등장해서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건물도 유한하고, 사람도 유한하고, 모든 것이 왔다가 사라진다. 그런 불변의 진리 앞에서 그는 굴하지 않고 흰머리와 굽은 등을 안고 팔을 뻗고 소리를 지른다. 마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삶을 사랑하겠다는 것처럼.
세운상가의 변화
1960년대 말 종로에 최신 유행을 앞세우고 들어선 세운상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서울 최고의 전자상가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빈 가게와 음침한 분위기로 오래된 서울의 얼굴이자 빨리 정리하고픈 애물단지가 되었다. 도심재생을 외치며 세운상가를 개발하겠다던 계획도 철거 후 개발을 외치다가 지금은 보존형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세운상가에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프로젝트가 2주간 열렸다. 상인들은 사람이 많이 오길 바라고, 예술가들은 낡은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상이몽이 따로 없다.
제주산지천
중국인 관광객과 투자자, 그리고 귀농귀촌 이주민 열풍으로 제주도의 부동산이 난리다. 혹자는 이런 분위기를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게 되면서 집값은 오르고 집을 지으려면 물류이동이 풍족하지 않아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최근 제2공항 계획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 부풀어 오르고 있다. 구도심 재개발도 한창이다. 제주시 중앙에 흐르는 산지천 주변으로 문화광장이 들어서는데 한참 부수고 고르고 다듬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이 끝난 2025년이면 제주는 어떤 모습일까?
웨딩드레스
신부라면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왜 흰색일까?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식에서 흰색드레스를 입은 후부터이다. 영국 귀족 결혼식에 흰색드레스 열풍이 불었고 이후 대중적인 결혼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순백색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시대에 하얀 드레스는 부의 상징이자, 백합과 같은 순수함과 정결함의 상징이 되었다. 서양문화를 수입한 한국에서도 흰색 웨딩드레스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인생의 중요한 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여성을 위해 디자이너가 만든 고가의 드레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웨딩숍 윈도우에 걸린 드레스.
안녕하세요?
양은희입니다. 300회를 맞아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 기회에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문학,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진은 그동안 제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입니다. 궁금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 읽고 돌아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미디어 덕분에 글보다 이미지가 더 힘을 가지는 시대에 색다른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양은희의 시각문화 이야기>인데 벌써 300회를 맞아 저도 감회가 남다릅니다. 앞으로도 이러저런 이미지와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해변의 의자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의자나 벤치에 앉아 풍경을 즐기는 여유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시간을 내어 바다와 바람이 좋은 곳으로 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휴가 또는 휴양이라고 불리는 이 시간의 질을 높이면 입소문이 나고 상품가치가 만들어진다. 제주도 월정리 해변의 의자. 작은 카페에 나무의자가 놓이자 그 의자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누리는 시간의 대명사가 되고, 해변을 찾는 이마다 사진을 찍는다. 그러자 하나둘씩 의자가 늘어나고 의자를 놓은 카페의 홍보도 치열하다.
아시아문화전당, 광주
역대 대통령들은 광주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도시 광주가 문화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비엔날레를 선사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선물했다. 민주화항쟁의 장소이자 광주 구도심의 상징인 전라남도 도청이 있던 자리와 인근지역을 합쳐서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만들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4-6층짜리 건물이 즐비한 동네를 배려해서 전당건물은 높이보다 깊이를 고려해서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건물을 지었다. 극장, 전시관, 정보원 등 여러 기관과 건물이 들어서는데 오는 25일 정식 개관한다.
캔디
달콤한데다 색깔까지 예쁜 캔디는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먹거리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꿀과 과일, 견과류를 섞어서 만들기 시작했다는 캔디는 꿀 대신에 설탕이 들어가면서 보다 보편화된다. 다른 음식과 마찬가지로 캔디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초콜렛을 사용한 캔디, 미국에서 유명한 롤리 팝 등, 모양과 색, 맛을 달리하면서 캔디는 중요한 상품으로 떠올랐고, 아이들과 키덜트를 유혹하는 먹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제주 월정리 카페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10년경 제주 동쪽 해변가 마을 월정리에 카페가 하나 생겼다. 조용한 해변과 에메랄드 바다 빛에 반한 젊은 여자들이 만든 <아일랜드 조르바>는 올레길 순례자를 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카페에서 찍은 사진과 카페 앞 의자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블로그를 통해 알려지면서 ‘가고 싶은 카페’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주인들은 의견이 맞지 않아 일부가 떠나면서 <아일랜드 조르바>를 가지고 갔고, 일부는 남아 새로이 이름 <고래가 될>을 만들었다. 그리고 허름한 카페 하나 덕분에 월정리는 새로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한 새로운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부동산 값은 뛰고 뛰어 현재 평당 500만원-1000만원을 웃돈다고 한다.
인재를 아끼는 법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서울처럼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잘 모른다. 시골 마을은 단순히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골에서는 농사일도 나눠서 하고, 아이도 같이 돌보며, 잔치도 같이 차린다. 마을에 똑똑한 인재가 나면 존경을 표하고 마치 가족의 일인냥 자랑스러워한다. 물론 질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질투를 공동체를 위해 꾹 누른다. 예전에 시골 마을이었던 곳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박사학위 취득 축하 현수막. 매년 1만 3천명 정도의 박사가 나오는 나라에서 박사학위 취득은 큰일도 아닌데, 축하하는 마음이 앞섰나 보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도시로 변했지만 동네 사람 마음은 여전히 예전 시골공동체의 순수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도시의 비둘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오래전 인간과 인연을 맺은 이후 비둘기는 개, 돼지, 소처럼 중요한 동물이 되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고, 일부 문화권에서는 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비둘기는 한때 인간이 할 수 없는 우편배달 업무를 수행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의 창시자인 폴 로이터가 수십 마리의 비둘기를 이용해 뉴스를 전달하던 때도 있었다. 비둘기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전쟁터를 누비며 중요한 메세지를 제때에 전달하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에서 공을 세운 비둘기 수십 마리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과 너무 가까워져서일까. 비둘기가 마치 집이 필요한 것처럼 부동산 가게 앞을 맴돈다.
날개의 유행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우리나라에 공공미술이 유행한 지 한참 되었다. 허름한 동네 빈 벽에 벽화를 그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길거리에서 벌이는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종류의 작업이 공공미술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벽화는 마을을 깔끔하게 만들고, 주위의 시선을 끈다는 이유로 종종 선호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동네가 붐비게 되면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탤런트 이승기가 종로구 이화마을의 날개 벽화를 배경으로 TV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나 밀려드는 사람으로 인해 결국 지워졌고, 이후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왕십리, 부산 등 여러 지역에 날개 벽화가 그려지면서 하나의 유행을 만들었다. 사진은 제주의 한 마을에까지 나타난 날개.
레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서양요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시큼한 레몬. 생선요리, 음료 등 쓰임새도 다양하다. 레몬은 나뭇잎부터 껍질, 그리고 속살까지 버리는 것 없이 다 사용되는 식자재이다. 잎은 차로, 껍질은 소스에, 속살은 시큼한 맛을 가미할 때 사용된다. 노란색 열매가 주는 맛의 세계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뿐만 아니다. 레몬은 피클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재료의 일부는 세제로도 사용된다. 그런 레몬은 원래 아시아 태생이다. 인도, 중국 지역에서 자라던 레몬이 유럽에 들어간 것은 로마시대로 이후 아랍권과 지중해권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세계3대 레몬 생산국은 중국, 인도, 그리고 멕시코이다.
거울의 마법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옥수수가 널린 방 중앙 벽에 거울이 있다. 그 거울에 옥수수뿐만 아니라 오래된 찬장이 비쳐진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 찬장 정 가운데에 상반신이 비치면서 장면을 완성한다. 거울로 된 방은 수수께끼같은 호기심을 일으키는 장치로 유럽의 왕실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노는 놀이공원 등에 활용되어 왔다. 예술가가 신기한 거울 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야요이 쿠사마부터 여러 예술가가 거울의 반사작용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설치작업을 한 바 있다. 사진속의 작품은 마르지아 밀리오라(Marzia Migliora)의 <정물화>(2015)이다.
유럽 건물의 리모델링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오래된 건물로 가득 찬 유럽의 도시들은 고민이 많다.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도시를 개발하려니 도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그대로 두려니, 좁고 낡은 건물을 수리하는 비용과 시간에 비해 얻는 결과가 효율적이지 못하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현대적 기술로 낡은 건물의 외양을 살리면서도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주거, 사무, 문화 등 여러 용도에 맞는 건물을 짓는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사진속의 건물은 오래된 건물의 외벽 한 면만 살리고, 나머지는 현대식으로 지은 것이다. 과거와 현대의 절묘한 절충이다.
바벨탑
파스타
마이욜의 조각
아르 누보 가구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
거리의 악사
아르토
빈센트
탈출하라
공사장 가림막
와플의 세계
베니스의 빌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빨래 옷 너는 거리
나무의 미학
희생자를 기리는 법
커피와 정복의 역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변하는 교회
베니스의 시장
병기창의 중국작가
아포테오시스
피노 컬렉션
주식 거래소
초콜렛 명가 노이하우스
데세리
카페 플로리안
리옹역
벼룩시장
마리아 마르탱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
늙은 소나무
법보단
김환기 전시
김환기 작업실
부엌을 위한 그림
장욱진미술관
서울의 풍경
셸리의 시
폐허의 예술
남해바다
남성성
영자의 전성시대
피카소의 은인
하늘과 틀
서자복
건축의 미
나만의 텃밭
트릭 아트
마구잡이 현대미술?
이해 못할 현대미술?
스튜디올로
육전(리우보)
리처드 롱
잭슨 폴록
수평의 미학
야요이 쿠사마
도시의 무지개
그린 빌딩 시청사
복합문화공간 마루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종로에 있던 공간사옥이 미술관으로 변했다. 한국 근대건축가 김수근이 1971년 지었고 그가 설립한 공간그룹의 보금자리이자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가의 교류의 장이었으나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결국 소유주가 바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담쟁이 덩굴이 건물을 뒤덮어서인지 경매에서도 팔리지 못했던 이 건물을 인수한 이는 아라리오의 김창일 회장. 인수하자마자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자신의 주요 컬렉션을 배치해 놓은 후 2014년 9월 문을 열었다. 신관에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파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제주 아라리오 미술관
최근 제주에 부는 바람을 요약하면, 보헤미안의 이주와 중국인의 부동산 투자이다. 사람이 들어오니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 그런데 보헤미안이라고 다 같은 보헤미안이 아니다. 한국 미술계의 '이단아'이자 파격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천안 아라리오 대표가 서울, 베이징, 뉴욕에 이어서 제주에 미술공간을 열었는데, 제주시 탑동에 있던 낡은 영화관을 개조해서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미술관을 지었다. 관광지가 아닌, 토박이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동네에 중요한 공간을 만들어 문화 제주를 이끌고 있다.
제주 본태박물관
얼음공주로 유명했던 한 아나운서가 시집을 간다고 방송이 요란했던 게 몇 년 전이다. 그 아나운서의 시어머니가 제주도 비오토비아 옆에 박물관을 지었다. 사실 개인이 지은 박물관은 크기가 크지 않고 마치 별장의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이 딱 맞는 경우인 것 같다. 소담한 크기에 개인이 모은 조선시대 반상, 자수품등과 함께 야요이 쿠사마의 현대미술이 어우러져 개관전을 치렀다. 하필이면 고른 건축가가 일본의 안도 다다오. 한국부자의 일본 건축가 애호는 끝이 없다.
비오토피아 두손미술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현대 건축의 시멘트 사랑은 끝이 없다. 이타미 준이 비오토피아 내에 만든 돌, 물, 바람 미술관외에도 두손미술관이 있는데 시멘트 패널을 활용한 공간이다. 손이 두 개 모여있는 ‘두손’을 연상시키는 이 공간은 작품전시를 하는 실용적인 미술관이기도 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시멘트의 찬 성질이 그대로 느껴지는가 하면 문밖으로 나오면 제주도 야산의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자연속의 시멘트 건물. 상반된 두 가지가 어울린 미술관이다.
방주교회
이타미 준의 물 박물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일본의 현대 건축은 인공적인 시멘트와 돌, 물, 나무 등 자연재료를 혼합하면서도 미니멀한 감성을 보여준다. 특히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베네세 하우스 오벌(Benesse House Oval)>(1995)은 시멘트와 물을 조화롭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하늘까지 감상할 수 있는 호텔이다. 제주에 지은 이타미 준의 <물 박물관>(2006)도 유사한 물과 원형의 시멘트 구조물 천정으로 하늘을 담아내는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호텔방이 없다는 것. 구도하는 승려처럼 조용한 명상의 공간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타미 준의 돌 박물관
돌, 바람, 여자. 삼다의 섬 제주를 좋아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은 고급 휴양지 비오토피아 내에 돌, 바람, 물을 위한 박물관을 각각 지었다. 말이 박물관이자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명상의 공간처럼 작은 공간이다. 억새가 펼쳐진 둔덕에 위치한 돌 박물관의 외관은 철로 일부러 부식되게 만들어 비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흔적을 남긴다. 안에는 돌과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주 흔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이타미 준의 바람 박물관
찬 공기가 더운 공기로 데워지면서 기류가 변하고 그 기류가 지속되면서 바람이 만들어진다. 볼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는 바람. 그 바람을 위한 박물관이 있다. 바람이 많은 섬 제주에 한 건축가는 나무 구조물로 틈새를 둔 텅 빈 박물관을 만들었다. 바람이 그 틈새로 지나가도록. 그런데 이 박물관에서 바람은 틈새를 지나갈 뿐만 아니라 나무와 부딪히면서 예측할 수 없는 소리도 낸다. 제주의 고급 휴양지 비오토피아 내에 건립된 바람 박물관은 재일교포이자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 유동룡)의 걸작 중 하나이다.
치훌리의 유리나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가장 성공한 유리공예 작가이자 예술가로서 대접받는 데일 치훌리(Dale Chihuly). 다채로우면서도 화려한 형상을 뽐내는 그의 유리 작업은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인기가 있다. 샹들리에에서부터 설치작업까지, 유리여서 불가능하다는 선입관을 깨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입으로 불면서 유리를 다루는 방식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그는 그 어려움을 딛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대가의 수준에 올랐다. 사진은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치훌리의 작업으로 13 미터에 달하는 높이에, 입으로 불면서 만든 2천 3백 개의 유리 잎을 모은 것이다.
주전자와 스타벅스
미국 보스턴 중심가에 거대한 주전자가 걸려있다. 주전자의 사연은 이러하다. 원래 ‘오리엔탈 티 컴퍼니’라는 회사가 1873년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찻주전자를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찻주전자가 걸리고 주전자 안에 수증기를 만드는 장치가 가끔 물이 끓는 것처럼 연기를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자 문화가 시작되었다. 그 안에 얼마나 물이 들어가는지 맞히는 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관광객을 위한 이야기 거리가 이어지면서 도시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명소에서 스타벅스 커피전문점이 들어온 건 탁월한 상술이다.
사무엘 아담스 묘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맥주 이름으로 유명한 사무엘 아담스. 사실 아담스는 보스턴에서 맥주보리 사업을 하던 비즈니스맨이자 후에 정치가로서 미국독립혁명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은 사람이다. 그런 그를 기리기 위해 1984년 보스턴 맥주회사에서 내놓은 브랜드명이 역사적 인물보다 더 유명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보스턴 맥주회사는 이 브랜드로 미국에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시장을 선도하게 되었고, 보스턴은 다시 한번 위대한 정치가를 통해 도시를 알리게 되었다. 사진은 보스턴 시내 중심에 있는 아담스의 묘비.
추모를 위한 조각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 보스턴 중심가 도로변에 추모비가 하나 있다. 1915년과 1922년 사이에 터키(당시의 오토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 1백5십 만명이 죽음을 당한 사건을 기억하자는 추모비다. 멸망의 기로에 있던 오토만 제국에서 제법 잘 살던 아르메니아 정착자들은 1차세계대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터키에 위협적인 존재로 몰리면서 결국 추방과 대학살의 대상이 된다. 내정의 혼란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극우주의의 결과였다. 그 대학살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보스턴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이 추모비를 세웠다. 세상이 바뀌어도, 망각의 동물 인간에게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솔 르윗의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대학을 졸업한 예술가가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지만 일단 성공 가도에 오르면 일이 몰려온다. 다른 모든 직업도 그렇듯이.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Witt)도 성공의 대열에 오르자 수많은 주문을 받게 된다. 그 중에는 정원 프로젝트도 있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가면 솔 르윗이 디자인한 야외 정원이 있다. 여느 정원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좋아했던 기하학적 디자인을 적용해서 꽃과 나무를 배열했다는 것이다. 새로움을 보여주라! 예술가와 미술관의 영원한 과제이다.
솔 르윗의 벽 드로잉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어떤 예술가는 평생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어떤 예술가는 평생 기계만 만지작거린다. 솔 르윗은 디자인, 회화, 오브제 등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였다. 먹고 사는 걱정은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어떤 순수한 아이디어에 몰두한다는 것은 예술가만이 누리는 사치 중의 하나이다.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Witt)는 1969년부터 벽에 직접 색칠을 하는 작업을 했는데 2007년 사망할 때까지 1200개가 넘은 벽 드로잉 작업을 남겼다. 모두 점, 선, 면 등 기하학적 요소를 활용한 벽화로 그가 작성한 지시문에 따라서 조수들이 실행에 옮긴 작업으로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미술관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오래된 미술관에는 꼭 실내 정원이 있다. 실내정원은 오래 전 왕실과 귀족의 문화였고, 예술도 왕실과 귀족의 문화였기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 실내정원이 들어선 것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물이 흐르고, 식물이 자라면서 곰팡이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자연채광을 들이기 때문에 실내정원 근처에는 조각 등 곰팡이에 저항력이 강한 예술품과 자외선에 강한 유물만 배열한다. 아무렴 어떤가. 물소리를 들으며, 이국적인 풀과 꽃을 보다가 잠시 오래된 석상을 보는 시간은 마치 과거 유럽의 한 궁전에 있다는 귀중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미술관 의자
미술관은 보물같은 예술작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찾아오는 이에게 예술의 감흥을 전달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야 한다. 적절한 감상을 위해 조명, 채광, 공간의 크기, 작품의 배열, 동선 등 챙겨야할 것도 많다. 100년전에는 벽이 꽉찰 정도로 그림을 걸었다면, 지금은 적절한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배열하여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100년전에도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상하는 이를 위한 소파와 의자이다. 노년의 관객이던, 젊은 관객이던 서서 잠시 보다가 가버리는 것보다 앉아서 그림을 보면서 쉬는 시간은 미술관만의 시간이다. 소위 ‘관조’의 시간, 그것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다.
디아 비컨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뉴욕주 비컨에도 낡은 공장이 있었다. 역시 미국 산업화 시대의 잔재이다. 뉴욕시에서 DIA 라는 예술센터를 운영하는 디아재단은 대형미술관 자리를 찾다가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1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이 낡은 나비스코 공장을 개조하여 2003년 문을 열었다. DIA Beacon은 현재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이자 허드슨 강변의 작은 마을을 글로벌 문화지도에 자리매김한 원동력이 되었다. 도시재생과 마을재생에 문화와 예술보다 더 좋은 답은 없다.
매스 모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 산업화의 흔적은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동네 노스 아담스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18세기말 이곳은 농업, 축산업으로 마을을 형성했고, 한때 가죽가공, 신발, 벽돌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경제 동력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공장을 문을 닫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미술인들이 1999년 덩그러니 남은 폐허에 현대미술관 매스 모카(MASS MoCA)을 유치하여 마을을 재생하게 된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명성을 날리자 지금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주하여 문화와 예술이 주가 된 생태문화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피츠버그의 도시 재생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피츠버그의 오래된 주거구역은 도심재생의 어젠다에서 후순위였다. 최근에야 대로변을 중심으로 새로운 타운하우스가 들어서고 있지만 골목안쪽에는 여전히 100년 가까이 된 집이 즐비하다. 지저분하게 쇠퇴하던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예술이었다. 젊은 예술가와 기획자가 모여 대안공간을 열자 예술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생적인 마을 가꾸기가 시작된 것이다. 벽화로 덮힌 센트럴 노스사이드의 한 골목.
피츠버그의 변화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한때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던 피츠버그는 미국 산업화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기오염, 지저분한 거리, 불편한 교통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950년대 이후 3700개의 건물을 부수고 5000가구 이상을 이주시키면서 도심을 정비했으나 철강산업이 동력을 잃으면서 인구와 자영업자가 줄면서 도시 활성화는커녕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도심 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고층건물과 비즈니스를 유치하고, 공공미술과 문화 부흥을 통해 잃었던 인구를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피츠버그의 스카이라인.
차 매니아의 티팟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중국에서 시작된 차 문화는 아시아, 유럽, 미국으로 퍼져갔다. 차잎을 우려낼 도구가 필요해 지면서 차 주전자(티팟)도 같이 개발되었는데,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모양의 차 주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송대의 중국에서 다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명대의 중국에서 현재의 차 우리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17세기 근대 유럽의 상인들이 아시아의 차와 차 주전자를 수입하여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유럽에서 차 주전자를 생산하기도 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티팟은 차를 좋아한 인류의 흔적이다.
영원한 모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모네는 자신이 태어난 파리와 그 인근의 자연, 도시와 자연에서 문화를 만드는 파리사람을 그리곤 했다. 해가 나고 지는 사이에 변하는 모습을 포착하려고 매일 한 장소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루앙 성당 시리즈이다. 1892년경 성당 맞은편에 작업실을 차리고 성당 파사드(정면)를 그리곤 했다. 현재 전 세계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총 30여점의 루앙 성당 그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이 색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잘 드러낸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바쁜 19세기 말 조용히 한켠에서 자신이 좋아한 것을 파고든 사람이 만든 불멸의 예술작품이다.
MIT 문장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의 MIT는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결과물이다. 19세기 후반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과학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이 대학을 나온 후 기업을 차린 동문도 많아서 현재 MIT 동문이 만든 회사의 매출을 다 합치면 세계 경제에서 1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디지털 시대에 기여한 많은 인물이 이 대학 출신이다. 지금은 기하학적인 수직 문양을 사용하고 있지만 2003년까지 MIT를 상징하는 문장은 ‘Mens et Manus’라는 라틴어를 담고 있는데 ‘정신과 손’이라는 뜻이다. 책만 읽지 말고 손도 써야 한다는 말로 왼쪽에는 기술자가, 오른쪽에는 학자의 모습을 새기고 있다.
MIT의 프랭크 게리 건물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세기 문명은 수직과 수평의 질서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 대학은 그러한 질서를 지키면서도 미래를 위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대로 유명한 미국 MIT의 캠퍼스에는 건축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는 스트라타 센터(Strata Center)가 있다. 1990년대 이후 위대한 건축가로 추앙받는 랭크 게리가 2004년에 설계한 건물로 마치 찌그러진 건물처럼 수직, 수평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기존의 건축 규범을 파괴하고 마치 조각처럼 다양한 형식과 재질을 사용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건물 안에서 강의를 하고 듣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간판의 미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도시마다 간판이 다르다. 서울은 한때 고속성장의 도시답게 광란의 간판이 많았으나 ‘디자인 도시 서울’사업 덕분에 다소 정비되었고 대신에 앙증맞은 간판이 늘어났다. 미국 예일대학이 있는 대학도시 뉴헤이븐은 전형적인 미국 북동부의 잘사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간판도 적당하게 개성있는 디자인을 입고, 적절한 크기로 달려있다. 간판의 색깔과 형태 역시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 역시 도시의 간판은 간판을 주문하는 사람과 제작하는 사람의 취향이 맞아 떨어져서 나오는 ‘간판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 같다.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세기 말 미국부자들이 여름을 보내던 뉴포트(Newport)에 테니스장을 갖춘 리조트인 ‘뉴포트 카지노’가 들어섰다. 잔디가 아름다운 이곳에 미국 최초의 테니스대회가 열리면서 범미국적인 관심을 받았으나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950년대에 들어서 건물을 구하기 위해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과 함께 소매 가게를 유치하게 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양식을 수입해서 만든 단순한 건축양식의 이 건물은 세상이 변하면서 미국 최고의 갑부부터 세계 최고의 테니스 스타까지 예사롭지 않은 인간의 흔적을 담은 유적이 되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보는 미디어 아트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보스턴에 가면 해안을 개발하면서 설립한 ICA가 있다. 현대예술을 선보이는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 현대식 건물에 들어선 ‘Poss Family Mediatheque'는 가장 압도적인데 유리창이 보스턴 내항의 수면을 향해 수직으로 나있어서 수평선이나 하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수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물과 함께 컴퓨터를 통해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행운의 조각상, 하버드 대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행운을 바라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실한 것 같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는 이 대학 입학을 바라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느라 한 동상의 발이 노랗게 닳아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존 하버드(John Harvard)로 그가 남긴 유산으로 대학을 지은 후 그를 기리는 동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1884년 동상을 만들 때 하버드는 이미 사망한지 200년도 넘었기 때문에 동상의 얼굴은 당시 하버드를 대표할 만한 한 학생의 얼굴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제3의 인물을 따서 만든 하버드의 동상을 만지면서 하버드에 들어갈 꿈을 꾸는 것이다.
H&M의 문화마케팅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기업이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전략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글로벌 시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예술마케팅은 필수적인 경쟁처럼 보인다. 프라다, BMW, 샤넬, 카르티에 등 유수한 기업들이 그동안 예술가와 손잡거나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의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지난여름 H&M은 뉴욕의 플랙쉽스토어의 건물 전면을 제프 쿤스의 작품 이미지로 도배를 하고, 같은 이미지를 담은 가방을 출시했다. 노란 풍선으로 만든 강아지모양의 이미지는 H&M의 로고와 함께 관광버스에도 나타났다. 같은 기간 동안 쿤스는 휘트니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업도 예술가도 윈윈하는 마케팅이다.
프리덤 타워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01년 911로 사라진 뉴욕의 월드 트레이터 센터의 쌍둥이 빌딩 자리에 새로이 건물이 들어섰다. 수천 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박물관이나 기념탑을 지을 것 같던 초창기 분위기와 달리 땅주인은 결국 지상 104층의 고층건물을 짓기로 했다. 맨해튼의 비싼 부동산 시장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아까운 월스트리트의 인재가 911의 불길과 같이 사라졌던 악몽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건물에 벌써 중국기업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테넌트가 계약을 맺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기억은 짧고 욕망은 강렬하다.
화분의 미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간이 자연을 집안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이후 화분은 정원과 원예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집트와 로마인들은 화분에 나무와 꽃을 심어 집을 장식하곤 했다.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테라코타로 만들던 화분은 비싼 도기와 세라믹으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화분을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화분에도 새로운 미학이 생겼다. 소위 ‘아나바다’ 정신을 계승하여 재활용 물건, 재활용 재료로 제작된 화분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창의적 발상의 한 단면이다.
뉴욕의 애플 매장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테크놀로지의 최첨단 장비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일 것이다. 작고 앙증맞은 기계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남녀노소가 전세계적으로 애호하는 도구가 되었다.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려는 스마트폰 제조회사의 경쟁은 선호도에 비례해서 커지고 있다. 검은 티와 청바지를 입고 소비자를 감동시키던 창립자의 정신에 맞게 애플의 매장은 캐주얼함, 실용성을 선호하는 젊은이에 맞게 디자인을 도입했다. 최신 상품을 만져보고 작동해 보는 것은 기본이고 ‘지니어스 바(Genius Bar= 천재의 카운터)'를 운영하면서 현대문명의 최전선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이곳은 애플의 상품을 잘 아는 직원들이 고객과 상담하는 곳이다.
뉴욕의 임시 급수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글로벌 도시 마다 수돗물이 안전하다고 홍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깨끗한 물, 건강한 물을 먹는 일은 웰빙의 척도가 되었고 20세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도시는 오래된 배관 시설로 깨끗한 물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을 보내는 수원지는 깨끗할지 모르나 도시의 낡은 시설은 그 질을 보장할 수 없는지 수돗물을 외면한 시민들은 점차 늘고 있다. 서울은 아리수를 홍보하고 있는 반면에 뉴욕시는 ‘Water-On-the-Go'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름마다 공원, 광장 등 사람이 많은 곳에 임시 급수대를 만들어 질 좋은 뉴욕물을 공짜로 마시라고 홍보하고 있다.
회전 목마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가면 동네 한 가운데에 회전목마가 아이들을 유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원래 기마병 문화에서 비롯된 말타기가 아이들의 회전목마로 탄생한 것은 17세기 말 파리이다. 이후 기술의 발달로 회전목마는 더 정교해졌고 19세기 말이 되면 기업화된 회전목마단이 도시마다 유랑하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거나 만국박람회와 같은 행사의 인기 손님이 되었다. 이후 신대륙과 아시아로 확산되었고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의 주요 시설이 되었다. 회전목마의 문화는 오늘날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아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마를 탄 어린 아이의 웃는 모습은 행복한 어린 시절의 상징이 되었다.
기하학과 미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수학의 한 분야로 발전한 기하학은 점, 선, 면, 입체 등 기본적인 형태의 속성을 연구한다. 소크라테스는 기학학은 마치 신이 우주를 만들 때 작용한 원리와 같다고 했다. 그만큼 자연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적인 형태가 자리잡고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사물과 인간, 자연의 형태를 본능적으로 배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질서와 조화를 포착한다. 한 예술가가 기학적 도형을 통해 미의 토대를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도형을 만든 재료가 색채가 가미된 플랙시글래스이기 때문이다. 1928년 개발된 이 재료는 유리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가벼우면서 유리대체효과가 있어서 자주 사용되는 물질인데, 20세기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구치 스타일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모든 것이 조각이다.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조각으로 보았다.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가이기는 하지만 무대미술, 디자인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모두 조각이라는 기본적인 활동의 연장이라고 본 것이다. 돌, 물, 나무와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램프, 커피 테이블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의 ‘조각’의 특징은 최소한의 단위를 사용해서 최대한 추상적으로 접근한다는 것. 사진에 보이는 것이 노구치가 디자인한 램프와 가구이다. 노구치 스타일은 물질을 삶속으로 담는 스타일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옥상정원과 댄 그래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세기 말 문화에 목마른 뉴욕시민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벤치마킹해서 만든 미술관이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유럽의 양대 박물관이 모두 왕실 컬렉션에서 출발했다면 뉴욕미술관은 문화를 사랑하는 뉴요커의 선행과 의지로 탄생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후 개인의 기증과 귀하게 구한 유물과 예술을 관리하면서 세계 4대 미술관으로 성장했는데 센트럴 파크 안에 위치하는데다가 볼거리가 많아서 누구든지 찾는 문화명소가 되었다. 옥상정원은 맨해튼 전망을 보고, 예술을 감상하고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인기 있는 여가 공간이다.
록펠러 센터의 제프 쿤스
도시화의 역사에서 록펠러 센터는 20세기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좁은 공간에 고층건물을 지어 기업을 유치하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모델을 대표한다.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건립된 이 센터는 1980년대 말 일본기업 미츠비시가 소유한 적도 있을 만큼 뉴욕 부동산 시장의 척도가 되었다. 현재 19개의 고층건물에 수많은 국제기업, 언론이 입주해 있으며 그 센터의 한 가운데 위치한 광장에는 UN 소속 국가의 국기가 날리고 유명 예술가의 예술품이 설치되며,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진다. 광장 아래에 장식된 황금색 조각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외치던 20세기 중반의 모습을, 광장 위에 설치된 예술가의 임시 설치는 지금의 얼굴을 보여준다. 최근 가장 사랑받는 제프 쿤스의 작업이 보인다.
브랑쿠지 스튜디오, 퐁피두 센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퐁피두 센터 한켠에 브랑쿠지가 생전에 사용했던 작업실이 옮겨와 전시되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이나 파리에서 성공한 브랑쿠지는 추상조각으로 유명하다.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인간의 고뇌를 표현했다면, 브랑쿠지는 계란형 덩어리로 인간의 머리를 단순하게 표현하여 고뇌가 사라지고 이성만 남은 인간을 표현했다. 20세기 조각의 역사를 바꾼 브랑쿠지는 자신의 작업실을 프랑스 정부에게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퐁피두 센터에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재건되었다.
퐁피두 센터,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70년대 고색창연한 파리에 신종 건물이 등장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관, 전시장, 도서관 등 여러 기능을 결합한 ‘센터’가 바로 퐁피두 센터이다. 완성된 6층짜리 건물은 배관, 골조가 그대로 방치된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배관에 기능별로 색을 입히고, 에스컬레이터가 노출되어 영원히 건축이 진행 중인 것 같은 이 건물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 작업이 되었고 렌조 피아노를 비롯한 건축가 3명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깔끔하고 질서 있는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미완성인 건축도 가능하다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온 건물이다.
팔레 드 도쿄,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글로벌 미술계에서 새로운 예술을 볼 수 있는 전초기지가 몇 개 있다. 뉴욕의 뉴뮤지엄, 파리의 팔레 드 도쿄가 그중에 속한다. 파리에 웬 도쿄냐고 할지 모르지만 프랑스가 제국의 영광을 누리고 있던 1937년에 연 <예술과 기술 국제박람회>용 전시장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2002년 현대미술전시장으로 개관했다. 외관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뜯어내어 창고와 같은 분위기를 살렸으며 이런 분위기를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팔레 드 도쿄’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
까르티에 재단,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티에가 설립된 것은 1847년 파리. 파리가 문화의 도시로 자리를 잡은 역사와 까르티에가 성공한 역사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유럽과 미주의 엘리트와 부자들이 파리에 와서 문화를 소비하면서 까르티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명품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까르티에 본사는 파리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의 도시에서 성공한 회사답게 1984년 예술을 장려하는 까르티에 재단을 설립했다. 장 누벨이 설계한 건물은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로 동시대 예술가를 선보이는 중요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소르본느 대학가의 카페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동네는 ‘라틴구역(Latin Quarter)’이라고 불린다. 오래전 소르본느가 탄생한 중세는 대부분 라틴어로 말하고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지식인/성직자라면 라틴어는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언어로, 마치 오늘날의 영어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래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이 많은 곳이라는 의미로 ‘라틴구역’이 되었다. 지금도 소르본느를 비롯한 많은 대학이 밀집한 곳으로 지식인이 공부하고 놀던 동네답게 오래된 카페가 좁은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다. 카페는 그래서 지식의 전당 뒤에 빼놓을 수 없는 여가의 공간이다.
소르본느 대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구감소로 한국의 대학은 구조조정중이다. 미래학자들은 대학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대학은 어땠을까. 원래 대학이라는 개념은 소수의 재능있는 젊은이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은 신학자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1250년대에 설립된 대학이다. 프랑스 혁명,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책을 거치면서 소르본느도 변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문과대학으로 자리잡는다. 다시 1968년 학생운동을 거치면서 파리 대학 시스템 속에 편입되어 지금은 오래전의 영광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다. 사진은 1880년대에 새로이 지은 소르본느 대학 본관.
파리의 오스망 양식 건물
1850년대 파리. 밀려드는 인구와 주거문제, 위생문제를 견디다 못해 나폴레옹 3세는 파리의 도시를 정비하게 된다. 좁은 골목, 오래된 건물을 헐고 넓은 길, 하수도, 공원, 광장 등 프랑스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오늘날 파리의 구도심은 바로 이때 진행한 도시정비의 결과이다. 가로수가 있는 길, 센느 강의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 기차역 광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넓은 대로변 좌우로 늘어선5-6층짜리 아파트 건물이다. 사진 속에보이는 건물이 바로 오스망 양식의 아파트 건물로 1층은 가게, 2층은 가게 주인의 집, 3층부터 중산층이 거주하는 주거공간이었다. 지금은 멋을 추구하는 부자들이 선호하는 아파트가 되었다.
갈레리 베로 도다
1820년대 파리. 하수도와 포장도로도 없고, 중세시대 건물이 그대로 있던 시절, 거리는 온갖 오물의 냄새로 진동했다. 신흥 중산층이 외출해서 갈만한 곳이 많지 않던 당시, 손님들에게 도시의 오물을 피해서 깨끗하고 안락한 쇼핑 거리를 제공한 곳이 갈레리 베로 도다(Galerie Vero-Dodat)이다. 베로 도다는 최초의 아케이드형 쇼핑가로 천정은 유리로 막아 날씨를 막을 수 있었고 좌우로 배열된 가게에서 먹고 마시고, 새로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이후 이 모델은 파리에 널리 퍼져서 1850년대 파리에 150여개의 아케이드가 있었으나 이후 백화점의 등장으로 사양길에 들어섰다.
에펠탑
1890년 파리. 유럽의 제국과 경쟁하면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마침 파리에서 열린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그 자긍심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제작했는데 바로 에펠탑이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던, 소위 19세기판 ‘바벨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탑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지금은 파리와 프랑스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문명과 문화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파리의 아르누보 지하철 입구
1900년 파리. 해가 지지 않은 영국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문화의 도시였다. ‘파리 메트로’라고 불리는 지하철이 생긴 것도 이때이다. 문화의 도시답게 지하철 디자인도 아름답게 만들었다. 공모를 거쳐 선정한 디자이너 엑터 기마르(Hector Guimard)는 지하철 내부는 곡선으로 터널을 만들고 흰색 타일로 마감처리를 했으며 지하철 입구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만들었다. 곡선미가 넘치는 아르누보 양식은 당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프를 우아하게 표현하면서 인기를 누렸던 양식이나 지금은 오래전 파리의 영광을 추억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몽마르트르
19세기 말 몽마르트르는 시골이었다. 가난한 농부와 상인이 살던 마을에 예술가가 몰려온 것은 도시 개발로 파리 시내에서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20세기 전반 미술의 역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러나 가난했던 예술가가 살면서 몽마르트르는 시골 동네에서 파리의 예술가촌으로 변모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는 당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온 관광객으로 붐빈다. 식당, 카페, 기념품점, 교회 등 붐비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100년 전 임대로 들어왔던 예술가 덕분에 온 동네가 문화관광으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주는 곳이다.
피카소 작업실
20세기 위대한 작가로 꼽히며 많은 예술가가 존경하는 피카소가 고향인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온 것은 19세기 후반. 가난한 젊은 예술가였지만 그림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는 파리에서도 변두리였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작업실을 얻었다. 그리고 그 작업실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고 신진 작가의 예술에 관심이 많던 컬렉터의 호감을 얻으면서 이후 승승장구 하게 된다. 사진 속의 건물은 피카소의 작업실이 있던 곳. 지금은 몽마르트르 박물관이 인수하여 역사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1층에 100년 전 살았던 피카소에 대한 설명문이 보인다.
주 드 폼, 파리
주 드 폼은 ‘손바닥 게임’이란 뜻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행하던 실내 테니스 경기를 말한다. 19세기 중반 주 드 폼은 실내 테니스 코트장으로 설립되었으나 1940년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이곳은 테니스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더 유명하게 되었다. 나치는 예술품을 약탈한 후 독일로 가져가 히틀러를 위한 미술관을 지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약탈한 미술품을 잠시 보관한 곳이 바로 주 드 폼이었다. 주 드 폼에서 근무하던 여성 큐레이터 로즈 발랑드는 이곳을 거쳐간 예술품의 목록과 행선지를 비밀리에 기록했고,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이를 추적하여 작품을 회수한 바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은 바로 이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이 건물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오늘날 글로벌 도시라면 오페라 하우스 하나 정도는 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는 그런 오페라 하우스의 원조격이다. 이곳은 ‘팔레 가르니에’ 또는 단순히 ‘더 오페라’라고 불린다. 파리가 문화의 도시로 성장하던 19세기 중반 샤를르 가르니에라는 건축가가 디자인했으며 장식이 많은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웅장한 외관뿐만 아니라 화려한 내부로도 유명한데, 소설 <오페라의 유령> (1910), 이후 뮤지컬로 나온 동명의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오페라 극장이기도 한다. 지금은 과거 제국의 향수를 머금은 곳으로 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나무의 일생
모든 것이 태어나서 사라진다. 귀여운 아기는 성인을 거쳐 노인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유한한생명을 가진 만물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은 죽은 후에도 쓸모 있게, 아름답게 남는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산 다음에도 예술가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변한다. 씨앗과 뿌리에서 자라서 녹음을 만들다가 죽은 후에는 예술로서 새로운 삶을 갖는 것이다. 인간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영혼이 떠나버린 세상에 아름다운 예술과 감동적인 책과 같은 것으로 남아 지속되지 않을까.
아트 전화부스
상상력은 시작도 끝도 없다. 무한대로 퍼져가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작업하는창작공간에는 모든 것이 상상력의 무대가 된다. 의자, 식탁, 문, 복도 등등. 한 예술가가 전화부스에 에너지를 쏟았다. 한쪽에는 전화기가, 다른 쪽에는 나무가 자라고, 나무 위에는 네온사인으로 된 ‘Art’라는 단어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전화부스 위에 Art가 열렸네….’
뷰티 아티스트
사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사람을 뷰티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아마도 인간의 미를 다룬다고 해서 붙은 명칭일 것이다. 화장술, 헤어 스타일링을 다루는 전문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 미국식 소비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특히 여성에게 경제력을 갖춘 직업군으로 인식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용사나 메이크 업 아티스트는 초기에 헤어 살롱과 같은 작은 규모의 샵에서 조수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보다 본격적인 직업학교의 등장으로 체계적인 과정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MBC와 같은 방송회사도 뷰티스쿨 사업을 벌이고 있다. Change to Artist. ‘예술가로 변하세요.’란 뜻인지 ‘예술가에게 변화를.’이란 뜻인지 알쏭달쏭하다.
장식용 접시
도자기의 영어 명은 china이다. 중국에서 온 물건을 보고 유럽인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도자기 산업은 오랫동안 세계 최고를 자랑했고, 14세기 이후 유럽의 왕실은 중국 도자기를 수입하여 왕실을 장식하기 위해 열을 올리기도 했다. 유럽에서 본 차이나와 같은 도자기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유럽에서 달아오른 도자기 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귀한 도자기를 장식용으로 쓰는 문화는 이후 새롭게 부상한 중산층에게도 퍼져 나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의 수집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장식용 기념품 접시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해서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나 요즘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진은 프랑스 가정에서 수집한 장식용 접시들.
힐링 쇼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