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예술공간 봄
이윤숙 관장이 수원의 오래된 도심 행궁동에 대안공간 눈을 열고 동네를 벽화마을로 만들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다. 허름한 동네에서 돈이 벌리지도 않고 시간과 에너지만 들이는 그의 문화 활동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주민도 있었으나, 기금을 받고 예술가가 오고가고 동네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자 그의 비전을 높이 평가하는 주민도 생겼다. 한 주민이 집을 팔게 되자 그를 찾아서 꼭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조건은 자신이 아끼던 건물의 원형을 보존한 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달라는 것. 그렇게 2014년 예술공간 봄이 대안공간 눈 옆에 문을 열고, 수원의 문화 자생력을 키우고 있다. 바로 옆에는 오래전부터 있던 창호공방.
문래동 도시재생
문래동에 철강공장, 용접소 등 거친 기계 소리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기오염이 가속되면서 1980년대 이후 서울시의 정책으로 이전하는 공장이 늘기 시작했다. 빈 공간에 홍대 등 인근 미술대학에서 조각 등을 전공한 예술인들이 싼 임대료에 이끌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약 25년 전. 지금 문래동은 각종 장르가 어우러진 문래예술촌으로 더 유명해졌다. 군데군데 벽화가 보이고, 철로 용접한 조각도 보인다. 사진은 문래예술촌의 대표 얼굴로 잘 알려진 깡통 로봇.
당진 아미미술관
미술관은 꿈을 먹고 탄생한다. 설립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꿈의 크기도, 질도, 깊이도 달라진다. 여느 시골처럼 당진에도 폐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폐교에 한 부부작가가 정착한 것은 1990년대 말. 파리 유학중 만나 결혼한 부부는 남편의 고향 당진의 낡은 학교 건물에 현대미술을 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학을 보여주고 싶었다. 15년 넘게 매달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하고 보수해 미술관을 열었다. 소담한 시골학교는 이제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쉼터가 되었고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온다. 미술관 카페에서 잠시 차 한잔을 마셔도 좋은 곳.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015년 가을 수원에 문을 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논란과 비판을 먹고 탄생한 곳이다.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로 유명한 현대산업개발은 수원에도 대단지 아파트를 개발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수원시가 제공한 부지에 300억을 들여 미술관 건물을 짓고 시에 기부한 것이다. 조건은 바로 미술관 명칭에 있다. 공공시설을 의미하는 ‘시립’과 비즈니스 브랜드를 보여주는 ‘아이파크’라는 명칭이 공존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시민단체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세련된 건물에 좋은 전시를 열면서 사람들이 몰리자 한정된 재정을 가진 지자체의 성공한 문화사업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중국어 수요
21세기 한국문화는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중국식당, 중국어 간판, 중국어 가이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국인의 한국행 덕분에 계속 생기는 것들이다. 중국인 관광객만 오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는 중국인 학생도 다수 온다. 투자 이민을 오는 이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사람이 몰리면 세상도 변한다. 대학가 교회에 중국어 예배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정부가 종교가입에 개입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려면 낯설지 않은 모국어 예배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리빙룸 뮤지엄
쇼핑의 천국 홍콩. 홍콩의 백화점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바로 예술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이다. 타임스 스퀘어 백화점 1층 광장에 전시장을 만든 것은 2015년 초. 그러나 식상한 문화센터나 갤러리가 아니라 고급스런 ‘뮤지엄’이라는 명칭을 택했다. 집이 좁은 홍콩의 주민을 유혹하기 위해 ‘거실’을 칭하는 ‘리빙 룸’을 표방하며 마치 거실에서 편안하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듯이 전시장에 오라는 의미로 ‘리빙룸 뮤지엄’을 만들었다. 지상 광장 최고의 자리에,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을 만들어, 특이한 예술가의 작업을 전시하면서 첨단을 달리는 백화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은 마이클 라우의 전시를 하는 리빙룸 뮤지엄.
가파도의 까치집
도시의 까치들은 봄마다 전쟁이다. 산란을 위해 봄이면 집이 필요한데, 선로나 전기공급선에 집을 지었다가 한전, 코레일에서 나온 직원에게 압류당하기 쉽다. 영특한 까치는 나뭇가지 말고도 금속, 비닐 등 쓸만한 재료는 죄다 동원해서 집을 짓기 때문이다. 제주 가파도의 까치도 고민은 많다. 높은 나무가 많지 않아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적기 때문이다. 영특한 까치가 스피커 봉에 까치집을 지었다. 피뢰침 때문에 번개가 칠 수도 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일단 집이 급했는지, 지어놓고 본 것 같다.
가파도의 유토피아
제주도 남쪽 가파도는 원래 무인도였다. 조선후기부터 사람이 들어와 개간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는데 1제곱킬로미터도 안되는 작은 섬이라 아직도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섬 자체가 나지막한데다, 집들도 나지막해서 도시에 지친 사람에게 적격인 섬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문명이 있는지라 가파도의 집마당은 주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바다에서 주워온 물건, 돌을 쌓아 올리고 좋아하는 풀과 꽃을 심어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주민도 있다. 한때 낚시꾼이 손님의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4-5월의 청보리축제를 보러 오는 방문객이 넘쳐나서 잠시 유토피아가 소란스러워 지기도 한다.
제주 ICC의 벼룩시장
벼룩시장이 문화산업이 되고 있다. 문화이주자들이 몰리는 제주에서 마을마다 주말에 여는 벼룩시장은 이주민들의 교류의 장이다. 최근 제주도는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식을 개최하면서 마을벼룩시장의 상인들을 모아 컨벤션센터의 로비에 임시 장을 만들었다. 초현대식 건물의 로비에 펼쳐진 장은 소담한 마을의 장터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이 모이는 장터가 중요한 행사의 부대행사가 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결국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홍콩 ADC Art Space
최근 홍콩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정부의 홍콩예술발전위원회(HKADC)는 문화예술정책과 기금을 제공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의 후원을 받아 예술가에게 저렴한 작업실을 제공하는 것도 이 기구의 업무이다. 2014년 허름한 공장지대의 웡죽항가에 문을 연 ADC 아트 스페이스는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한 힙싱홍사의 협력으로 시장보다 싼 가격에 공간을 임대하여 젊은 예술가와 단체에 재임대하고 있다.
BMW 아트 카
1975년경부터 독일의 자동차 회사 BMW는 ‘Art Car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계적인 예술가와 협업을 하고 있다. 엘베 풀렝이라는 예술 경매사가 자동차 레이싱을 좋아한 나머지 BMW에 자신의 경주용 차를 지원하도록 설득한 후에 얻은 차에다 당대 미국의 원로작가 알렉산더 칼더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후 BMW는 여러 예술가에게 아트 카를 의뢰하면서 40년 넘게 전통을 지키고 있다. 사진은 1976년 미국의 유명 작가 프랭크 스텔라에게 의뢰한 아트 카이다.
프린지 클럽, 홍콩
비영리 예술공간을 표방하는 홍콩의 프린지 클럽. 1984년 급하게 유가공 공장이었던 식민지 시대 건물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이 프린지 페스티발을 진행하다가 눌러 앉게 된 것이다. 이후 건물을 수리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는 클럽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예술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고층 건물로 즐비한 홍콩의 센트럴 지역에 있으면서도 고풍스런 외양덕분에 주류를 거부하고 ‘주변’을 강조하는 클럽문화에 어울리는 공간이 되었다. 공연을 올리고, 이벤트 행사에 공간을 임대하고, 카페의 수익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문화예술의 도시로 부상한 홍콩의 명물로 대접받고 있다.
웨스턴 마켓, 홍콩
영국식민지 시대인 1906년 홍콩의 웨스턴 마켓에 영국 에드워드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홍콩의 역사를 담은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였으나 점차 시장은 사라지고 주변이 고층건물이 즐비한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원래의 시장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대 쇼핑몰로 개조되어 카페, 공예품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2층의 원단가게들은 원래의 시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꼭대기 층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그랜드 스테이지’가 있는데 딤섬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은 그랜드 스테이지.
홍콩 JCCAC
영국인들이 진출한 홍콩에 경마 클럽이 만들어진 것은 1841년. 홍콩 자키 클럽은 이후 경마장을 운영하며 쏠쏠한 이익을 내곤 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익의 일부를 홍콩의 문화예술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2008년 문을 연 JCCAC(자키 클럽 창의예술센터)는 홍콩 자키 클럽이 기부한 돈으로 낡은 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1990년대 봉제공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나온 공장건물의 기존 구조를 그대로 살린 채 홍콩의 문화예술인의 창작센터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현재 100개가 넘는 예술단체, 그룹, 개인 작가 등이 작업실, 공방, 가게 등을 열고 있으며 이외에도 갤러리,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은 건물의 내부모습.
맞혀 보세요.
수년 전부터 영어권에 돌아다니는 유머가 있다. 소위 ‘얼마나 빨리 다음 단어들을 맞힐 수 있나요?’이다. 정답은 매우 평범한 단어들로 질문 바로 밑에 있다. 그런데 혹시 정답과 다른 단어, 특히 성과 관련된 단어를 연상한 사람이 있을까봐, ‘you dirty minded freak!'이라고 맨 끝에 쓰고 있다. 정답과 다른 답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때문이다. 툭하고 내놓은 말과 행동은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 퀴즈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지금까지도 인터넷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가 하면, 티셔츠 등 일상용품에도 실리고 있다. 사진은 한 화장실의 문.
K11
현대 자본은 젊은 수재를 좋아한다. 패기 넘치는 젊은이가 똑똑하고 재능까지 있으면 어딘가 쓸모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30대의 한 젊은이가 2008년 홍콩에 K11이라는 쇼핑몰 브랜드를 만들었다. 애드리안 챙이 예술과 쇼핑을 결합한 ‘아트 몰’을 지향하며 문을 연지 8년. 백화점과 쇼핑몰이 경쟁하는 가운데 선택한 차별화 전략으로 성공한 그는 2011년에 ‘K11 예술 재단’을 만들어 중국현대미술을 후원하고 있다. 대대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의 후손답게 문화와 예술에 쓰는 돈의 규모도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2014년에는 현대미술계의 힘 있는 인물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사진은 홍콩의 K11의 플라자.
3개의 시간
3개의 시계가 3곳의 시간을 말해준다. 홍콩, 바젤, 마이애미의 시간이다. 이 3곳의 공통점은 ‘아트페어가 열리는 도시’이다. 1970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된 아트페어는 2002년부터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서, 그리고 2013년부터 홍콩에서도 열리고 있다. 여는 아트 페어보다 아트 바젤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수질 관리’이다. 홍콩은 3월에, 바젤에서는 6월에, 마이애미에서는 12월에 열리는데, 1년 중 쉴 새 없이 여는 미술장터는 이제 믿을 만한 투자처를 찾아 돌아다니는 자본을 흡수하는 글로벌 비즈니스가 되었다. 부동산, 주식처럼 미술에 투자하려는 부자들이라면 이 3개의 아트페어 중 한 곳에는 꼭 들리고 있다.
홍콩 아트 바젤
중국 근대사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홍콩. 그러나 자유무역항이자 무관세 정책으로 지금은 세계의 자본이 몰리는 곳 중 한곳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가장 큰 홍콩의 변화는 세계미술시장으로의 도약이다.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진출하면서 중국과 아시아의 미술을 거래하고, 홍콩 아트 바젤, 아트 센트럴 등의 아트페어가 성장하면서 홍콩을 빼고 미술시장을 논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홍콩 아트페어에 스위스의 아트 바젤이 개입하면서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 주말 열린 홍콩 아트 바젤의 전시장 모습.
이중섭 거리, 서귀포
이중섭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 평양인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평양, 원산, 부산, 통영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사망한 불운의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6.25 피난시절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던 도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중섭의 족적을 기리고 있다. 제주는 이중섭을 기리며 문화예술 활성화에 성공한 곳이다.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거리를 만들고 제주의 대표적인 예술의 거리로 성장시켰다. 특히 이 미술관이 운영하는 창작스튜디오는 무료로 1년 동안 서귀포에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어느 새 국내 예술가들 사이에 인기 있는 곳이 되었다.
명품취향
이탈리아 명품이 한국의 일상에 들어온 지도 한참 되었다. 지하철에서도 명품 가방을 든 여성들이 흔히 보일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한 브랜드의 가방은 유독 한국과 일본의 여성들이 좋아했고, 지금은 중국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특정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패턴은 곧 유사품을 낳는다. 한 버스의 의자커버도 바로 그 명품 브랜드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공공버스의 의자커버에 등장한 패턴은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명품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리얼리즘의 귀환
그림을 그릴 때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그림을 구상이라고 한다. 그런 구상회화 중에서도 사회의 현실을 드러내는 구상미술을 리얼리즘 회화라고 부른다. 예컨대, 낡은 농부의 신발을 통해서 고단한 노동을 드러낸다거나, 고개 숙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침묵 속에서 인내하는 보통 시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리얼리즘이 한국화단을 강타한 적이 있다. 이름하여 민중미술. 그런데 요즘 그런 리얼리즘 미술이 다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사동에서 열린 한 전시에 굵직한 작가들이 모여서 현실문제를 화두로 삼은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
한 예술가 공동체가 <테이크아웃 드로잉>을 만든 지 10여년이 되었다. 대학로, 성북동, 이태원 등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카페를 겸한 문화공간을 운영해 왔다. 운 좋게 얻은 이태원 가게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성공은 곧 임대료 인상과 주인의 매도로 이어졌다. 유명가수가 이 건물을 산 후 퇴거하라고 하자, 이들은 더 이상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혹여 철거명령을 이행할까봐 예술가들은 밤에도 카페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투쟁에 ‘대망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길기원, 예술가의 게임
한 예술가가 길을 가다가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흔한 의자에 대충 만든 테이블로 된 임시 ‘기원’이었다. 이 기원을 만든 사람들은 심지어 누가 의자나 테이블을 가져갈까봐 ‘길기원’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예술가가 바둑을 두는 사람들에게 새로 의자와 테이블을 사다 줄테니 지금 있는 것들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자, 의아해하면서도 허락을 했다. 예술가는 그 물건들을 전시장에 가져다가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고 그 게임장 소품으로 활용했다. 유목연 작가의 <예술가의 게임>은 그렇게 길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통해 예술로 탄생했다.
거로마을 문화공간 양
제주시 화북동은 일찍이 포구를 통해 신문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화북의 거로마을은 유학을 숭배하는 문화가 퍼지고, 예의바른 동네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본군은 마을 한 가운데로 큰 도로를 빼면서 조용한 마을을 두 동네로 갈라버렸다. 도시화가 진행된 오늘날 거로마을은 한적한 시골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동네에 할머니가 남겨주신 집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주민들과 호흡하는 이가 있다. 김범진 관장은 김연주 큐레이터와 작가를 초대하는 레지던시, 전시공간, 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오래된 마을에 온기를 지피고 있다.
윤석남의 사모곡
나이 40을 넘겨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윤석남. 가정주부로 산 삶을 뒤로 하고 그림을 배우고 전업작가로 나섰고, 1990년대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작가가 되었다. 70을 넘긴 지금까지도 윤석남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는 바로 ‘어머니’.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 어머니를 그리며 수십 년간 작업의 화두로 삼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다 못한 어머니 이야기는 한지, 구슬, 나무 등 흔한 재료로 만든 설치작업으로 탄생했다. 사진은 최근작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 IV>이다.
입춘 맞이 축제
사람의 삶이 자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 계절의 변화는 중요한 일이었다. 음역 1월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입춘을 두고 봄의 시작을 기념하곤 했다. ‘입춘대길’이라고 쓴 입춘방을 기둥이나 문에 써 붙이고 봄이 도래를 기뻐했다. 특이하게 제주도에서는 입춘에 ‘입춘굿’을 한다. 아마도 척박한 화산섬이라 무당 문화가 성행했던 전통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입춘굿이 열리면, 축하행렬이 시내 곳곳을 누비고, 행정기관이었던 관정정 앞마당에서 극과 음악을 즐기곤 했다. 사진은 올해 입춘굿의 장면.
제주의 봄
섬이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를 보고 매료되는 사람이 많다. 그중에는 조각가 박충흠도 있다. 볕이 잘 드는 산자락에 <제주 봄>을 만들어 살고 있다. 성공한 예술가로 살다가 온 서귀포에 카페, 작업실, 갤러리,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손님을 맞고 있다. 갤러리는 요청한 손님에 한해 문을 열어 주는데, 예술가가 만든 공간이어서인지 설치작품과 어두운 조명, 고즈넉한 분위기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먹고, 자고,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예술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
추사유배지, 제주
조선시대 제주는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오는 유배지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제주에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을 연마하며 빼어난 결과를 얻은 이도 있다. 학자이자 서예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렸던 추사 김정희는 1840-1849년까지 제주도 서남쪽 대정현에서 9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 그린 <세한도>는 삭풍이 부는 움막에서 고고히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다. 2010년 대정에는 건축가 승효상이 추사의 <세한도>를 해석해서 설계한 추사관이 들어서 그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사진은 기념관의 내부.
서귀포 관광극장
1963년 개관한 서귀포 관광극장은 오랫동안 서귀포의 명물이었다. 종종 누전사고가 생기면서 문을 닫은 후 방치되어 있었다. 2015년 노천극장으로 다시 태어난 이곳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서귀포시가 원 소유주에게 건물을 빌려서 리모델링한 후 지역주민협의회에 운영을 맡겼다. 이중섭 거리라는 위치도 그렇고, 오래된 건물을 재생했다는 기쁨이 배가되면서 밴드 공연,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역시 도시 재생과 활성화에는 문화예술만한 것이 없다.
서점의 진화
책을 파는 책방, 서점은 책의 진화와 맥을 같이 한다. 15세기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이후 이를 활용한 인쇄기가 보편화되면서 17세기 이후 책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인기있던 책은? 당연히 성경이었다. 이후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그 수요를 따라가기 위해 기업화되고, 특화되면서 서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서점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밝은 매장에 전시장, 독서할 수 있는 책상, 소파 등을 구비해서 책읽는 즐거움을 잊지 않게 해준다. 서귀포에 들어선 한 서점의 모습.
서촌의 변화
2000년대 들어 변모한 서울의 동네 중에서도 서촌은 독보적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허름한 동네였던 이곳은 지금 아기자기한 건물이 새로이 들어서면서 제트리피케이션이 제공하는 모든 변화를 보여준다. 서촌에서도 경복궁이 가까운 동네에 새로이 갤러리와 식당이 들어선 건물이 세워졌다. 보고 먹는 여가생활에 적절한 시설들이다. 토요일 짬이 날 때, 지하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보고, 1층의 일본식 가정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곧잘 보인다. ‘개미둥지’ 식당을 홍보하듯, 개미들이 건물을 뒤덮고 있다. 예술적 사고로 건물을 보는 주인의 여유가 돋보인다.
미드웨스트의 평원
미국 영토에서도 북부 중앙부분을 미드웨스트라고 부른다. 일리노이주를 비롯한 약 12개주에 걸쳐 펼쳐진 ‘미드웨스트’는 19세기부터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많고, 농업에서 중공업으로 변화한 산업구도를 그대로 보여기 때문이다. 옥수수, 밀, 콩 등 곡물농사로도 유명한 미드웨스트를 차로 지나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밭이 인상적이다. 신대륙의 비옥한 토양위에 자라는 곡물은 미국의 아침식사를 책임진다고도 알려져 있다.
김삿갓 마케팅
조선시대 양반가에 태어났으나 조부의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평생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았던 김병연. 지팡이에 의존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방랑시인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지 않고 마음이 닿는 대로 자유인의 삶을 산 그는 양심과 고아한 지성을 가진 신비로운 인물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 김삿갓이 등장해 상품을 홍보한다. 모든 것이 소비의 망을 벗어날 수 없는 오늘날 김삿갓의 이미지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청파동 상가
6.25를 겪고 새로 태어난 서울은 현대적인 건물이 즐비하다. 높은 고층건물이 많기는 하지만 그 사이로 낮으면서도 규모가 작은 오래된 건물도 많다. 청파동은 특히 그런 건물이 많이 보이는 곳 중 하나이다. 서울역 인근에 있어서인지 교통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고, 사람이 많아서 상가도 발달했다. 일제 시대 부터 소규모 상가건물이 많았고, 지금도 앙증맞은 가게가 즐비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테마파크의 거리를 걷는 듯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곳이다.
제주도의 돌집
제주도에 이주 열풍이 불고 있다. 작년에는 한 달 평균 1650명이 제주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례해서 새 집을 짓고, 헌 집을 고치고 있다. 사진은 이주민이 새롭게 바꾼 돌집. 원래 초가지붕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들었던 집이 1970년대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었다가 2000년대 들어 사진처럼 현대적인 집으로 바뀌고 있다. 파, 마늘이 들어섰던 텃밭은 잔디밭으로 바뀌고 예쁜 파라솔과 의자도 들어섰다. 이렇게 고친 집은 직접 거주하기도 하고 독채 펜션으로 임대해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1월의 수선화
자기 사랑과 고결함을 상징하는 수선화는 지중해에서부터 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자란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제주도와 거문도에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해마다 1월이 오면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수선화가 만개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주도에 수선화 향기가 퍼지고 있다. 카페 주인은 수선화 한 다발을 사다가 유리병에 담아 차가운 바람을 피해 온 손님을 반긴다.
피카소의 누드
1929년경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입체파 시기와 달리 형상은 원래의 인체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또한 당시 부인 올가와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성적인 부인과 달리 쾌활하면서 다혈질이었던 피카소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빨리 바뀌는 편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무너지는 결혼을 암시하듯, <안락의자의 누드> 속에 보이는 올가는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말라서 늘어진 시체처럼 표현되어 있다. 사진 속의 오른쪽 그림이다.
소파와 냉장고
프랑스 작가 베르트랑 라비에는 일상적 관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이것을 ‘증명’이라고 부르는데, 사진에 보는 것처럼 입술모양의 소파를 냉장고 위에 놓고 그 맥락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섹시할 정도로 빨간 입술모양의 소파는 원래 살바도르 달리가 1937년 여배우 매이 웨스트의 입술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소파이다. 그리고 냉장고는 유명회사 보쉬가 제작한 것인데, 라비에는 흔한 냉장고 위에 소파를 놓고 질문을 던진다. 이 둘은 어떤 관계일까?
오베르의 교회
천재 화가 반 고흐가 말년을 보낸 마을이 바로 오베르 쉬르 오아조이다. 파리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이 마을에 가세박사가 살고 있었고 그 박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1890년경 이 마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마을 곳곳을 화폭에 담곤 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13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다. 데 그는 이 교회를 배회하면서 화폭에 담곤 했는데, 구불구불한 선으로 형상을 그리는 성숙한 그의 화법을 구사했다. 현재 그의 그림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교회는 여전히 오베르 마을에 서있는데, 반 고흐의 이야기는 이 마을을 살리는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제주도의 일출
새해가 뜹니다. 구름을 제치고, 산등성이를 지나, 해가 뜹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해가 뜹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을 딛고 자연은 계속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변함없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닮아가길 빕니다.
제주 벨롱장
제주시 동쪽 바닷가 세화리에는 한 달에 2번 노천 장터가 열린다. 해변을 따라 공예품, 먹거리가 판매되는데 제주로 이주한 이주민과 토착민, 여행자가 어우러져 정감어린 시간을 보낸다. 멀리서 불빛이 반짝인다는 의미의 제주어 ‘벨롱’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아쉽게도 겨울이 되면 잠시 장을 닫게 되는데, 올해는 따뜻한 벙커에서 12월 장을 이어가고 있다. 커피 박물관 바움이 보유한 벙커에서 열리는 벨롱장, 따스한 바닷바람은 없지만, 따뜻한 사람 입김으로 채워진다.
벙커의 변신
1990년 한국통신이 만든 벙커가 제주에 있었다.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국가기반시설로 오랫동안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던 곳이다. 지하에 만들어서인지 내부는 16도 정도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제주도 동쪽에 있는 이곳을 인수한 한 커피 박물관이 벙커를 문화인들에게 오픈했다. 900평에 달하는 공간을 노래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문을 열어 닫혀있던 곳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코릿 푸드 페스티발
한국과 미식이 만나면, Korea+Eat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한국대표 레스토랑 랭킹 코릿(KOREAT)이 탄생했다. 미식전문가 100명이 맛을 따지고 고른 레스토랑들이 선정된다. ‘코릿 페스티벌’은 그 식당의 셰프들이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파는 축제로, 2015년 가을 제주에서 열렸다. 모든 음식이 1개에 5000원인데, 한 끼 식사로 배를 채우려면 3개를 구매해야 할 정도이다. 피자에서 스시, 타파스까지 싼 편이 아닌데도 고급스런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소문에 줄이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여행과 요리를 접목한 새로운 축제로 성공할 것 같다.
북한음식
평양비빔밥, 해주비빔밥, 개성장국밥. 익숙하지 않은 요리이다. 종로의 한 식당 광고에 나온 음식들로 분단의 시대에 경험할 기회가 없던 것들이라서 그런지 눈이 간다. 맛을 어떨까? 어떤 재료가 들어갈까? 언제 통일이 올지 모르고, 이산가족은 상봉할 기회도 많지 않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긴장과 공포, 그리고 아픔과, 그리움, 아쉬움을 안고 산다. 이보다 인간적일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린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서 음식으로라도 먼 곳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혼성문화
서울의 문화를 보려면 명동의 간판을 보면 된다. 서울의 쇼핑가인데도 한국어보다 중국어와 영어간판이 대다수이다. 소비자를 위해 변하는 가게들. 큰 간판들은 누가 제일 큰 고객인지 말해준다. 변하는 명동의 가게를 통해 단지 중국인과 외국인 소비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취향과 패션, 음식문화도 점점 뿌리를 내리고 한국의 음식뿐만 아니라 외국음식끼리 혼합되기도 한다. 그래서 명동은 가장 빠른 속도로 문화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자, 글로벌 시대의 소비문화의 향방을 예측할 있는 곳이다.
예술가의 위로
현대예술이 어렵다고 외면하는 사람을 위해 예술가들이 나섰다. 차를 만들어 대접하고, 요리도 해주고, 음악도 들려준다. 1990년대부터 관객의 행복과 즐거움을 꾀하고 행복한 관객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게 만드는 예술이 등장했다. 인간 사이의 관계회복을 모색하는 ‘관계미학’을 추구하는 이런 예술은 그동안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다만 예술가에게 돌아오는 것이 거의 없어서 미안할 정도이다. 한 예술가가 피로에 지친 사람에게 마사지를 제공하고 있다. 왼쪽에 앉은 작가가 마사지에 앞서서 관객에게 줄 타월(예술가가 지방 여관이나 모텔에 갈 때마다 가지고 온 것이다.)에 사인을 하고 있다.
소설 베끼기
미술관 작은 방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필기도구가 있다. 미리 온라인으로 신청한 사람이 한 명씩 그 방에 들어가 책상위에 있는 책을 그대로 공책에 베낀다. 그 책들은 카프카의 <성>, 이상의 <날개> 등 예전에 한번 읽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작가 안규철은 책이 소중했던 옛날, 병원에서 퇴근한 아버지가 의학서적을 정갈하게 베끼며 공부하던 모습을 떠올려 이 작업을 구상했다. 관람객은 집중하며 소설을 베끼고, 멀리서 다른 관객은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은 멋있게 보일 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준다.
어린이재단 기금모금
약자를 돕는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어린이 구호사업에 봉사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 사업를 이어가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매년 기금을 모아 국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이 어린이를 돕고 있다. 녹색리본을 달고 걷기대회를 하기도 하고, 사진전을 여는가 하면, 청계천에 초록우산을 매달아 후원자의 고운 마음을 알리고 있다. 올 가을에도 청계천에 걸린 초록 우산들이 걸렸다. 우산 손잡이에는 후원자의 이름을 알리는 명찰이 붙여, ‘당신도 동참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다.
늙은 예술가의 내공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만드는 워크숍, 판매대, 전시, 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되었다. 늙은 건물의 수명을 아쉬워하듯, 늙은 예술가가 등장해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의 이름은 성능경. 1970년대 등장해서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건물도 유한하고, 사람도 유한하고, 모든 것이 왔다가 사라진다. 그런 불변의 진리 앞에서 그는 굴하지 않고 흰머리와 굽은 등을 안고 팔을 뻗고 소리를 지른다. 마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삶을 사랑하겠다는 것처럼.
세운상가의 변화
1960년대 말 종로에 최신 유행을 앞세우고 들어선 세운상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서울 최고의 전자상가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빈 가게와 음침한 분위기로 오래된 서울의 얼굴이자 빨리 정리하고픈 애물단지가 되었다. 도심재생을 외치며 세운상가를 개발하겠다던 계획도 철거 후 개발을 외치다가 지금은 보존형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세운상가에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프로젝트가 2주간 열렸다. 상인들은 사람이 많이 오길 바라고, 예술가들은 낡은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상이몽이 따로 없다.
제주산지천
중국인 관광객과 투자자, 그리고 귀농귀촌 이주민 열풍으로 제주도의 부동산이 난리다. 혹자는 이런 분위기를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게 되면서 집값은 오르고 집을 지으려면 물류이동이 풍족하지 않아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최근 제2공항 계획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 부풀어 오르고 있다. 구도심 재개발도 한창이다. 제주시 중앙에 흐르는 산지천 주변으로 문화광장이 들어서는데 한참 부수고 고르고 다듬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이 끝난 2025년이면 제주는 어떤 모습일까?
웨딩드레스
신부라면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왜 흰색일까?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식에서 흰색드레스를 입은 후부터이다. 영국 귀족 결혼식에 흰색드레스 열풍이 불었고 이후 대중적인 결혼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순백색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시대에 하얀 드레스는 부의 상징이자, 백합과 같은 순수함과 정결함의 상징이 되었다. 서양문화를 수입한 한국에서도 흰색 웨딩드레스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인생의 중요한 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여성을 위해 디자이너가 만든 고가의 드레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웨딩숍 윈도우에 걸린 드레스.
안녕하세요?
양은희입니다. 300회를 맞아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 기회에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문학,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진은 그동안 제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입니다. 궁금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 읽고 돌아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미디어 덕분에 글보다 이미지가 더 힘을 가지는 시대에 색다른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양은희의 시각문화 이야기>인데 벌써 300회를 맞아 저도 감회가 남다릅니다. 앞으로도 이러저런 이미지와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해변의 의자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의자나 벤치에 앉아 풍경을 즐기는 여유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시간을 내어 바다와 바람이 좋은 곳으로 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휴가 또는 휴양이라고 불리는 이 시간의 질을 높이면 입소문이 나고 상품가치가 만들어진다. 제주도 월정리 해변의 의자. 작은 카페에 나무의자가 놓이자 그 의자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누리는 시간의 대명사가 되고, 해변을 찾는 이마다 사진을 찍는다. 그러자 하나둘씩 의자가 늘어나고 의자를 놓은 카페의 홍보도 치열하다.
아시아문화전당, 광주
역대 대통령들은 광주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도시 광주가 문화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비엔날레를 선사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선물했다. 민주화항쟁의 장소이자 광주 구도심의 상징인 전라남도 도청이 있던 자리와 인근지역을 합쳐서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만들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4-6층짜리 건물이 즐비한 동네를 배려해서 전당건물은 높이보다 깊이를 고려해서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건물을 지었다. 극장, 전시관, 정보원 등 여러 기관과 건물이 들어서는데 오는 25일 정식 개관한다.
캔디
달콤한데다 색깔까지 예쁜 캔디는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먹거리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꿀과 과일, 견과류를 섞어서 만들기 시작했다는 캔디는 꿀 대신에 설탕이 들어가면서 보다 보편화된다. 다른 음식과 마찬가지로 캔디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초콜렛을 사용한 캔디, 미국에서 유명한 롤리 팝 등, 모양과 색, 맛을 달리하면서 캔디는 중요한 상품으로 떠올랐고, 아이들과 키덜트를 유혹하는 먹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제주 월정리 카페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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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경 제주 동쪽 해변가 마을 월정리에 카페가 하나 생겼다. 조용한 해변과 에메랄드 바다 빛에 반한 젊은 여자들이 만든 <아일랜드 조르바>는 올레길 순례자를 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카페에서 찍은 사진과 카페 앞 의자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블로그를 통해 알려지면서 ‘가고 싶은 카페’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주인들은 의견이 맞지 않아 일부가 떠나면서 <아일랜드 조르바>를 가지고 갔고, 일부는 남아 새로이 이름 <고래가 될>을 만들었다. 그리고 허름한 카페 하나 덕분에 월정리는 새로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한 새로운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부동산 값은 뛰고 뛰어 현재 평당 500만원-1000만원을 웃돈다고 한다.
인재를 아끼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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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처럼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잘 모른다. 시골 마을은 단순히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골에서는 농사일도 나눠서 하고, 아이도 같이 돌보며, 잔치도 같이 차린다. 마을에 똑똑한 인재가 나면 존경을 표하고 마치 가족의 일인냥 자랑스러워한다. 물론 질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질투를 공동체를 위해 꾹 누른다. 예전에 시골 마을이었던 곳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박사학위 취득 축하 현수막. 매년 1만 3천명 정도의 박사가 나오는 나라에서 박사학위 취득은 큰일도 아닌데, 축하하는 마음이 앞섰나 보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도시로 변했지만 동네 사람 마음은 여전히 예전 시골공동체의 순수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도시의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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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인간과 인연을 맺은 이후 비둘기는 개, 돼지, 소처럼 중요한 동물이 되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고, 일부 문화권에서는 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비둘기는 한때 인간이 할 수 없는 우편배달 업무를 수행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의 창시자인 폴 로이터가 수십 마리의 비둘기를 이용해 뉴스를 전달하던 때도 있었다. 비둘기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전쟁터를 누비며 중요한 메세지를 제때에 전달하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에서 공을 세운 비둘기 수십 마리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과 너무 가까워져서일까. 비둘기가 마치 집이 필요한 것처럼 부동산 가게 앞을 맴돈다.
날개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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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공공미술이 유행한 지 한참 되었다. 허름한 동네 빈 벽에 벽화를 그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길거리에서 벌이는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종류의 작업이 공공미술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벽화는 마을을 깔끔하게 만들고, 주위의 시선을 끈다는 이유로 종종 선호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동네가 붐비게 되면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탤런트 이승기가 종로구 이화마을의 날개 벽화를 배경으로 TV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나 밀려드는 사람으로 인해 결국 지워졌고, 이후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왕십리, 부산 등 여러 지역에 날개 벽화가 그려지면서 하나의 유행을 만들었다. 사진은 제주의 한 마을에까지 나타난 날개.
레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서양요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시큼한 레몬. 생선요리, 음료 등 쓰임새도 다양하다. 레몬은 나뭇잎부터 껍질, 그리고 속살까지 버리는 것 없이 다 사용되는 식자재이다. 잎은 차로, 껍질은 소스에, 속살은 시큼한 맛을 가미할 때 사용된다. 노란색 열매가 주는 맛의 세계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뿐만 아니다. 레몬은 피클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재료의 일부는 세제로도 사용된다. 그런 레몬은 원래 아시아 태생이다. 인도, 중국 지역에서 자라던 레몬이 유럽에 들어간 것은 로마시대로 이후 아랍권과 지중해권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세계3대 레몬 생산국은 중국, 인도, 그리고 멕시코이다.
거울의 마법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옥수수가 널린 방 중앙 벽에 거울이 있다. 그 거울에 옥수수뿐만 아니라 오래된 찬장이 비쳐진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 찬장 정 가운데에 상반신이 비치면서 장면을 완성한다. 거울로 된 방은 수수께끼같은 호기심을 일으키는 장치로 유럽의 왕실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노는 놀이공원 등에 활용되어 왔다. 예술가가 신기한 거울 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야요이 쿠사마부터 여러 예술가가 거울의 반사작용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설치작업을 한 바 있다. 사진속의 작품은 마르지아 밀리오라(Marzia Migliora)의 <정물화>(2015)이다.
유럽 건물의 리모델링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오래된 건물로 가득 찬 유럽의 도시들은 고민이 많다.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도시를 개발하려니 도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그대로 두려니, 좁고 낡은 건물을 수리하는 비용과 시간에 비해 얻는 결과가 효율적이지 못하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현대적 기술로 낡은 건물의 외양을 살리면서도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주거, 사무, 문화 등 여러 용도에 맞는 건물을 짓는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사진속의 건물은 오래된 건물의 외벽 한 면만 살리고, 나머지는 현대식으로 지은 것이다. 과거와 현대의 절묘한 절충이다.
바벨탑
파스타
마이욜의 조각
아르 누보 가구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
거리의 악사
아르토
빈센트
탈출하라
공사장 가림막
와플의 세계
베니스의 빌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빨래 옷 너는 거리
나무의 미학
희생자를 기리는 법
커피와 정복의 역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변하는 교회
베니스의 시장
병기창의 중국작가
아포테오시스
피노 컬렉션
주식 거래소
초콜렛 명가 노이하우스
데세리
카페 플로리안
리옹역
벼룩시장
마리아 마르탱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
늙은 소나무
법보단
김환기 전시
김환기 작업실
부엌을 위한 그림
장욱진미술관
서울의 풍경
셸리의 시
폐허의 예술
남해바다
남성성
영자의 전성시대
피카소의 은인
하늘과 틀
서자복
건축의 미
나만의 텃밭
트릭 아트
마구잡이 현대미술?
이해 못할 현대미술?
스튜디올로
육전(리우보)
리처드 롱
잭슨 폴록
수평의 미학
야요이 쿠사마
도시의 무지개
그린 빌딩 시청사
복합문화공간 마루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종로에 있던 공간사옥이 미술관으로 변했다. 한국 근대건축가 김수근이 1971년 지었고 그가 설립한 공간그룹의 보금자리이자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가의 교류의 장이었으나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결국 소유주가 바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담쟁이 덩굴이 건물을 뒤덮어서인지 경매에서도 팔리지 못했던 이 건물을 인수한 이는 아라리오의 김창일 회장. 인수하자마자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자신의 주요 컬렉션을 배치해 놓은 후 2014년 9월 문을 열었다. 신관에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파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제주 아라리오 미술관
최근 제주에 부는 바람을 요약하면, 보헤미안의 이주와 중국인의 부동산 투자이다. 사람이 들어오니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 그런데 보헤미안이라고 다 같은 보헤미안이 아니다. 한국 미술계의 '이단아'이자 파격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천안 아라리오 대표가 서울, 베이징, 뉴욕에 이어서 제주에 미술공간을 열었는데, 제주시 탑동에 있던 낡은 영화관을 개조해서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미술관을 지었다. 관광지가 아닌, 토박이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동네에 중요한 공간을 만들어 문화 제주를 이끌고 있다.
제주 본태박물관
얼음공주로 유명했던 한 아나운서가 시집을 간다고 방송이 요란했던 게 몇 년 전이다. 그 아나운서의 시어머니가 제주도 비오토비아 옆에 박물관을 지었다. 사실 개인이 지은 박물관은 크기가 크지 않고 마치 별장의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이 딱 맞는 경우인 것 같다. 소담한 크기에 개인이 모은 조선시대 반상, 자수품등과 함께 야요이 쿠사마의 현대미술이 어우러져 개관전을 치렀다. 하필이면 고른 건축가가 일본의 안도 다다오. 한국부자의 일본 건축가 애호는 끝이 없다.
비오토피아 두손미술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현대 건축의 시멘트 사랑은 끝이 없다. 이타미 준이 비오토피아 내에 만든 돌, 물, 바람 미술관외에도 두손미술관이 있는데 시멘트 패널을 활용한 공간이다. 손이 두 개 모여있는 ‘두손’을 연상시키는 이 공간은 작품전시를 하는 실용적인 미술관이기도 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시멘트의 찬 성질이 그대로 느껴지는가 하면 문밖으로 나오면 제주도 야산의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자연속의 시멘트 건물. 상반된 두 가지가 어울린 미술관이다.
방주교회
이타미 준의 물 박물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일본의 현대 건축은 인공적인 시멘트와 돌, 물, 나무 등 자연재료를 혼합하면서도 미니멀한 감성을 보여준다. 특히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베네세 하우스 오벌(Benesse House Oval)>(1995)은 시멘트와 물을 조화롭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하늘까지 감상할 수 있는 호텔이다. 제주에 지은 이타미 준의 <물 박물관>(2006)도 유사한 물과 원형의 시멘트 구조물 천정으로 하늘을 담아내는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호텔방이 없다는 것. 구도하는 승려처럼 조용한 명상의 공간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타미 준의 돌 박물관
돌, 바람, 여자. 삼다의 섬 제주를 좋아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은 고급 휴양지 비오토피아 내에 돌, 바람, 물을 위한 박물관을 각각 지었다. 말이 박물관이자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명상의 공간처럼 작은 공간이다. 억새가 펼쳐진 둔덕에 위치한 돌 박물관의 외관은 철로 일부러 부식되게 만들어 비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흔적을 남긴다. 안에는 돌과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주 흔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이타미 준의 바람 박물관
찬 공기가 더운 공기로 데워지면서 기류가 변하고 그 기류가 지속되면서 바람이 만들어진다. 볼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는 바람. 그 바람을 위한 박물관이 있다. 바람이 많은 섬 제주에 한 건축가는 나무 구조물로 틈새를 둔 텅 빈 박물관을 만들었다. 바람이 그 틈새로 지나가도록. 그런데 이 박물관에서 바람은 틈새를 지나갈 뿐만 아니라 나무와 부딪히면서 예측할 수 없는 소리도 낸다. 제주의 고급 휴양지 비오토피아 내에 건립된 바람 박물관은 재일교포이자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 유동룡)의 걸작 중 하나이다.
치훌리의 유리나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가장 성공한 유리공예 작가이자 예술가로서 대접받는 데일 치훌리(Dale Chihuly). 다채로우면서도 화려한 형상을 뽐내는 그의 유리 작업은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인기가 있다. 샹들리에에서부터 설치작업까지, 유리여서 불가능하다는 선입관을 깨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입으로 불면서 유리를 다루는 방식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그는 그 어려움을 딛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대가의 수준에 올랐다. 사진은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치훌리의 작업으로 13 미터에 달하는 높이에, 입으로 불면서 만든 2천 3백 개의 유리 잎을 모은 것이다.
주전자와 스타벅스
미국 보스턴 중심가에 거대한 주전자가 걸려있다. 주전자의 사연은 이러하다. 원래 ‘오리엔탈 티 컴퍼니’라는 회사가 1873년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찻주전자를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찻주전자가 걸리고 주전자 안에 수증기를 만드는 장치가 가끔 물이 끓는 것처럼 연기를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자 문화가 시작되었다. 그 안에 얼마나 물이 들어가는지 맞히는 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관광객을 위한 이야기 거리가 이어지면서 도시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명소에서 스타벅스 커피전문점이 들어온 건 탁월한 상술이다.
사무엘 아담스 묘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맥주 이름으로 유명한 사무엘 아담스. 사실 아담스는 보스턴에서 맥주보리 사업을 하던 비즈니스맨이자 후에 정치가로서 미국독립혁명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은 사람이다. 그런 그를 기리기 위해 1984년 보스턴 맥주회사에서 내놓은 브랜드명이 역사적 인물보다 더 유명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보스턴 맥주회사는 이 브랜드로 미국에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시장을 선도하게 되었고, 보스턴은 다시 한번 위대한 정치가를 통해 도시를 알리게 되었다. 사진은 보스턴 시내 중심에 있는 아담스의 묘비.
추모를 위한 조각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 보스턴 중심가 도로변에 추모비가 하나 있다. 1915년과 1922년 사이에 터키(당시의 오토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 1백5십 만명이 죽음을 당한 사건을 기억하자는 추모비다. 멸망의 기로에 있던 오토만 제국에서 제법 잘 살던 아르메니아 정착자들은 1차세계대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터키에 위협적인 존재로 몰리면서 결국 추방과 대학살의 대상이 된다. 내정의 혼란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극우주의의 결과였다. 그 대학살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보스턴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이 추모비를 세웠다. 세상이 바뀌어도, 망각의 동물 인간에게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솔 르윗의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대학을 졸업한 예술가가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지만 일단 성공 가도에 오르면 일이 몰려온다. 다른 모든 직업도 그렇듯이.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Witt)도 성공의 대열에 오르자 수많은 주문을 받게 된다. 그 중에는 정원 프로젝트도 있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가면 솔 르윗이 디자인한 야외 정원이 있다. 여느 정원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좋아했던 기하학적 디자인을 적용해서 꽃과 나무를 배열했다는 것이다. 새로움을 보여주라! 예술가와 미술관의 영원한 과제이다.
솔 르윗의 벽 드로잉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어떤 예술가는 평생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어떤 예술가는 평생 기계만 만지작거린다. 솔 르윗은 디자인, 회화, 오브제 등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였다. 먹고 사는 걱정은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어떤 순수한 아이디어에 몰두한다는 것은 예술가만이 누리는 사치 중의 하나이다.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Witt)는 1969년부터 벽에 직접 색칠을 하는 작업을 했는데 2007년 사망할 때까지 1200개가 넘은 벽 드로잉 작업을 남겼다. 모두 점, 선, 면 등 기하학적 요소를 활용한 벽화로 그가 작성한 지시문에 따라서 조수들이 실행에 옮긴 작업으로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미술관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오래된 미술관에는 꼭 실내 정원이 있다. 실내정원은 오래 전 왕실과 귀족의 문화였고, 예술도 왕실과 귀족의 문화였기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 실내정원이 들어선 것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물이 흐르고, 식물이 자라면서 곰팡이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자연채광을 들이기 때문에 실내정원 근처에는 조각 등 곰팡이에 저항력이 강한 예술품과 자외선에 강한 유물만 배열한다. 아무렴 어떤가. 물소리를 들으며, 이국적인 풀과 꽃을 보다가 잠시 오래된 석상을 보는 시간은 마치 과거 유럽의 한 궁전에 있다는 귀중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미술관 의자
미술관은 보물같은 예술작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찾아오는 이에게 예술의 감흥을 전달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야 한다. 적절한 감상을 위해 조명, 채광, 공간의 크기, 작품의 배열, 동선 등 챙겨야할 것도 많다. 100년전에는 벽이 꽉찰 정도로 그림을 걸었다면, 지금은 적절한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배열하여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100년전에도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상하는 이를 위한 소파와 의자이다. 노년의 관객이던, 젊은 관객이던 서서 잠시 보다가 가버리는 것보다 앉아서 그림을 보면서 쉬는 시간은 미술관만의 시간이다. 소위 ‘관조’의 시간, 그것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다.
디아 비컨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뉴욕주 비컨에도 낡은 공장이 있었다. 역시 미국 산업화 시대의 잔재이다. 뉴욕시에서 DIA 라는 예술센터를 운영하는 디아재단은 대형미술관 자리를 찾다가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1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이 낡은 나비스코 공장을 개조하여 2003년 문을 열었다. DIA Beacon은 현재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이자 허드슨 강변의 작은 마을을 글로벌 문화지도에 자리매김한 원동력이 되었다. 도시재생과 마을재생에 문화와 예술보다 더 좋은 답은 없다.
매스 모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 산업화의 흔적은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동네 노스 아담스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18세기말 이곳은 농업, 축산업으로 마을을 형성했고, 한때 가죽가공, 신발, 벽돌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경제 동력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공장을 문을 닫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미술인들이 1999년 덩그러니 남은 폐허에 현대미술관 매스 모카(MASS MoCA)을 유치하여 마을을 재생하게 된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명성을 날리자 지금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주하여 문화와 예술이 주가 된 생태문화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피츠버그의 도시 재생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피츠버그의 오래된 주거구역은 도심재생의 어젠다에서 후순위였다. 최근에야 대로변을 중심으로 새로운 타운하우스가 들어서고 있지만 골목안쪽에는 여전히 100년 가까이 된 집이 즐비하다. 지저분하게 쇠퇴하던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예술이었다. 젊은 예술가와 기획자가 모여 대안공간을 열자 예술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생적인 마을 가꾸기가 시작된 것이다. 벽화로 덮힌 센트럴 노스사이드의 한 골목.
피츠버그의 변화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한때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던 피츠버그는 미국 산업화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기오염, 지저분한 거리, 불편한 교통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950년대 이후 3700개의 건물을 부수고 5000가구 이상을 이주시키면서 도심을 정비했으나 철강산업이 동력을 잃으면서 인구와 자영업자가 줄면서 도시 활성화는커녕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도심 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고층건물과 비즈니스를 유치하고, 공공미술과 문화 부흥을 통해 잃었던 인구를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피츠버그의 스카이라인.
차 매니아의 티팟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중국에서 시작된 차 문화는 아시아, 유럽, 미국으로 퍼져갔다. 차잎을 우려낼 도구가 필요해 지면서 차 주전자(티팟)도 같이 개발되었는데,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모양의 차 주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송대의 중국에서 다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명대의 중국에서 현재의 차 우리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17세기 근대 유럽의 상인들이 아시아의 차와 차 주전자를 수입하여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유럽에서 차 주전자를 생산하기도 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티팟은 차를 좋아한 인류의 흔적이다.
영원한 모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모네는 자신이 태어난 파리와 그 인근의 자연, 도시와 자연에서 문화를 만드는 파리사람을 그리곤 했다. 해가 나고 지는 사이에 변하는 모습을 포착하려고 매일 한 장소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루앙 성당 시리즈이다. 1892년경 성당 맞은편에 작업실을 차리고 성당 파사드(정면)를 그리곤 했다. 현재 전 세계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총 30여점의 루앙 성당 그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이 색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잘 드러낸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바쁜 19세기 말 조용히 한켠에서 자신이 좋아한 것을 파고든 사람이 만든 불멸의 예술작품이다.
MIT 문장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국의 MIT는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결과물이다. 19세기 후반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과학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이 대학을 나온 후 기업을 차린 동문도 많아서 현재 MIT 동문이 만든 회사의 매출을 다 합치면 세계 경제에서 1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디지털 시대에 기여한 많은 인물이 이 대학 출신이다. 지금은 기하학적인 수직 문양을 사용하고 있지만 2003년까지 MIT를 상징하는 문장은 ‘Mens et Manus’라는 라틴어를 담고 있는데 ‘정신과 손’이라는 뜻이다. 책만 읽지 말고 손도 써야 한다는 말로 왼쪽에는 기술자가, 오른쪽에는 학자의 모습을 새기고 있다.
MIT의 프랭크 게리 건물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세기 문명은 수직과 수평의 질서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 대학은 그러한 질서를 지키면서도 미래를 위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대로 유명한 미국 MIT의 캠퍼스에는 건축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는 스트라타 센터(Strata Center)가 있다. 1990년대 이후 위대한 건축가로 추앙받는 랭크 게리가 2004년에 설계한 건물로 마치 찌그러진 건물처럼 수직, 수평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기존의 건축 규범을 파괴하고 마치 조각처럼 다양한 형식과 재질을 사용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건물 안에서 강의를 하고 듣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간판의 미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도시마다 간판이 다르다. 서울은 한때 고속성장의 도시답게 광란의 간판이 많았으나 ‘디자인 도시 서울’사업 덕분에 다소 정비되었고 대신에 앙증맞은 간판이 늘어났다. 미국 예일대학이 있는 대학도시 뉴헤이븐은 전형적인 미국 북동부의 잘사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간판도 적당하게 개성있는 디자인을 입고, 적절한 크기로 달려있다. 간판의 색깔과 형태 역시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 역시 도시의 간판은 간판을 주문하는 사람과 제작하는 사람의 취향이 맞아 떨어져서 나오는 ‘간판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 같다.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세기 말 미국부자들이 여름을 보내던 뉴포트(Newport)에 테니스장을 갖춘 리조트인 ‘뉴포트 카지노’가 들어섰다. 잔디가 아름다운 이곳에 미국 최초의 테니스대회가 열리면서 범미국적인 관심을 받았으나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950년대에 들어서 건물을 구하기 위해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과 함께 소매 가게를 유치하게 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양식을 수입해서 만든 단순한 건축양식의 이 건물은 세상이 변하면서 미국 최고의 갑부부터 세계 최고의 테니스 스타까지 예사롭지 않은 인간의 흔적을 담은 유적이 되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보는 미디어 아트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보스턴에 가면 해안을 개발하면서 설립한 ICA가 있다. 현대예술을 선보이는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 현대식 건물에 들어선 ‘Poss Family Mediatheque'는 가장 압도적인데 유리창이 보스턴 내항의 수면을 향해 수직으로 나있어서 수평선이나 하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수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물과 함께 컴퓨터를 통해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행운의 조각상, 하버드 대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행운을 바라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실한 것 같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는 이 대학 입학을 바라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느라 한 동상의 발이 노랗게 닳아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존 하버드(John Harvard)로 그가 남긴 유산으로 대학을 지은 후 그를 기리는 동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1884년 동상을 만들 때 하버드는 이미 사망한지 200년도 넘었기 때문에 동상의 얼굴은 당시 하버드를 대표할 만한 한 학생의 얼굴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제3의 인물을 따서 만든 하버드의 동상을 만지면서 하버드에 들어갈 꿈을 꾸는 것이다.
H&M의 문화마케팅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기업이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전략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글로벌 시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예술마케팅은 필수적인 경쟁처럼 보인다. 프라다, BMW, 샤넬, 카르티에 등 유수한 기업들이 그동안 예술가와 손잡거나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의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지난여름 H&M은 뉴욕의 플랙쉽스토어의 건물 전면을 제프 쿤스의 작품 이미지로 도배를 하고, 같은 이미지를 담은 가방을 출시했다. 노란 풍선으로 만든 강아지모양의 이미지는 H&M의 로고와 함께 관광버스에도 나타났다. 같은 기간 동안 쿤스는 휘트니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업도 예술가도 윈윈하는 마케팅이다.
프리덤 타워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01년 911로 사라진 뉴욕의 월드 트레이터 센터의 쌍둥이 빌딩 자리에 새로이 건물이 들어섰다. 수천 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박물관이나 기념탑을 지을 것 같던 초창기 분위기와 달리 땅주인은 결국 지상 104층의 고층건물을 짓기로 했다. 맨해튼의 비싼 부동산 시장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아까운 월스트리트의 인재가 911의 불길과 같이 사라졌던 악몽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건물에 벌써 중국기업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테넌트가 계약을 맺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기억은 짧고 욕망은 강렬하다.
화분의 미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간이 자연을 집안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이후 화분은 정원과 원예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집트와 로마인들은 화분에 나무와 꽃을 심어 집을 장식하곤 했다.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테라코타로 만들던 화분은 비싼 도기와 세라믹으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화분을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화분에도 새로운 미학이 생겼다. 소위 ‘아나바다’ 정신을 계승하여 재활용 물건, 재활용 재료로 제작된 화분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창의적 발상의 한 단면이다.
뉴욕의 애플 매장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테크놀로지의 최첨단 장비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일 것이다. 작고 앙증맞은 기계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남녀노소가 전세계적으로 애호하는 도구가 되었다.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려는 스마트폰 제조회사의 경쟁은 선호도에 비례해서 커지고 있다. 검은 티와 청바지를 입고 소비자를 감동시키던 창립자의 정신에 맞게 애플의 매장은 캐주얼함, 실용성을 선호하는 젊은이에 맞게 디자인을 도입했다. 최신 상품을 만져보고 작동해 보는 것은 기본이고 ‘지니어스 바(Genius Bar= 천재의 카운터)'를 운영하면서 현대문명의 최전선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이곳은 애플의 상품을 잘 아는 직원들이 고객과 상담하는 곳이다.
뉴욕의 임시 급수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글로벌 도시 마다 수돗물이 안전하다고 홍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깨끗한 물, 건강한 물을 먹는 일은 웰빙의 척도가 되었고 20세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도시는 오래된 배관 시설로 깨끗한 물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을 보내는 수원지는 깨끗할지 모르나 도시의 낡은 시설은 그 질을 보장할 수 없는지 수돗물을 외면한 시민들은 점차 늘고 있다. 서울은 아리수를 홍보하고 있는 반면에 뉴욕시는 ‘Water-On-the-Go'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름마다 공원, 광장 등 사람이 많은 곳에 임시 급수대를 만들어 질 좋은 뉴욕물을 공짜로 마시라고 홍보하고 있다.
회전 목마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가면 동네 한 가운데에 회전목마가 아이들을 유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원래 기마병 문화에서 비롯된 말타기가 아이들의 회전목마로 탄생한 것은 17세기 말 파리이다. 이후 기술의 발달로 회전목마는 더 정교해졌고 19세기 말이 되면 기업화된 회전목마단이 도시마다 유랑하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거나 만국박람회와 같은 행사의 인기 손님이 되었다. 이후 신대륙과 아시아로 확산되었고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의 주요 시설이 되었다. 회전목마의 문화는 오늘날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아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마를 탄 어린 아이의 웃는 모습은 행복한 어린 시절의 상징이 되었다.
기하학과 미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수학의 한 분야로 발전한 기하학은 점, 선, 면, 입체 등 기본적인 형태의 속성을 연구한다. 소크라테스는 기학학은 마치 신이 우주를 만들 때 작용한 원리와 같다고 했다. 그만큼 자연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적인 형태가 자리잡고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사물과 인간, 자연의 형태를 본능적으로 배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질서와 조화를 포착한다. 한 예술가가 기학적 도형을 통해 미의 토대를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도형을 만든 재료가 색채가 가미된 플랙시글래스이기 때문이다. 1928년 개발된 이 재료는 유리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가벼우면서 유리대체효과가 있어서 자주 사용되는 물질인데, 20세기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구치 스타일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모든 것이 조각이다.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조각으로 보았다.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가이기는 하지만 무대미술, 디자인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모두 조각이라는 기본적인 활동의 연장이라고 본 것이다. 돌, 물, 나무와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램프, 커피 테이블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의 ‘조각’의 특징은 최소한의 단위를 사용해서 최대한 추상적으로 접근한다는 것. 사진에 보이는 것이 노구치가 디자인한 램프와 가구이다. 노구치 스타일은 물질을 삶속으로 담는 스타일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옥상정원과 댄 그래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세기 말 문화에 목마른 뉴욕시민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벤치마킹해서 만든 미술관이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유럽의 양대 박물관이 모두 왕실 컬렉션에서 출발했다면 뉴욕미술관은 문화를 사랑하는 뉴요커의 선행과 의지로 탄생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후 개인의 기증과 귀하게 구한 유물과 예술을 관리하면서 세계 4대 미술관으로 성장했는데 센트럴 파크 안에 위치하는데다가 볼거리가 많아서 누구든지 찾는 문화명소가 되었다. 옥상정원은 맨해튼 전망을 보고, 예술을 감상하고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인기 있는 여가 공간이다.
록펠러 센터의 제프 쿤스
도시화의 역사에서 록펠러 센터는 20세기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좁은 공간에 고층건물을 지어 기업을 유치하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모델을 대표한다.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건립된 이 센터는 1980년대 말 일본기업 미츠비시가 소유한 적도 있을 만큼 뉴욕 부동산 시장의 척도가 되었다. 현재 19개의 고층건물에 수많은 국제기업, 언론이 입주해 있으며 그 센터의 한 가운데 위치한 광장에는 UN 소속 국가의 국기가 날리고 유명 예술가의 예술품이 설치되며,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진다. 광장 아래에 장식된 황금색 조각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외치던 20세기 중반의 모습을, 광장 위에 설치된 예술가의 임시 설치는 지금의 얼굴을 보여준다. 최근 가장 사랑받는 제프 쿤스의 작업이 보인다.
브랑쿠지 스튜디오, 퐁피두 센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퐁피두 센터 한켠에 브랑쿠지가 생전에 사용했던 작업실이 옮겨와 전시되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이나 파리에서 성공한 브랑쿠지는 추상조각으로 유명하다.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인간의 고뇌를 표현했다면, 브랑쿠지는 계란형 덩어리로 인간의 머리를 단순하게 표현하여 고뇌가 사라지고 이성만 남은 인간을 표현했다. 20세기 조각의 역사를 바꾼 브랑쿠지는 자신의 작업실을 프랑스 정부에게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퐁피두 센터에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재건되었다.
퐁피두 센터,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70년대 고색창연한 파리에 신종 건물이 등장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관, 전시장, 도서관 등 여러 기능을 결합한 ‘센터’가 바로 퐁피두 센터이다. 완성된 6층짜리 건물은 배관, 골조가 그대로 방치된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배관에 기능별로 색을 입히고, 에스컬레이터가 노출되어 영원히 건축이 진행 중인 것 같은 이 건물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 작업이 되었고 렌조 피아노를 비롯한 건축가 3명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깔끔하고 질서 있는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미완성인 건축도 가능하다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온 건물이다.
팔레 드 도쿄,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글로벌 미술계에서 새로운 예술을 볼 수 있는 전초기지가 몇 개 있다. 뉴욕의 뉴뮤지엄, 파리의 팔레 드 도쿄가 그중에 속한다. 파리에 웬 도쿄냐고 할지 모르지만 프랑스가 제국의 영광을 누리고 있던 1937년에 연 <예술과 기술 국제박람회>용 전시장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2002년 현대미술전시장으로 개관했다. 외관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뜯어내어 창고와 같은 분위기를 살렸으며 이런 분위기를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팔레 드 도쿄’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
까르티에 재단, 파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티에가 설립된 것은 1847년 파리. 파리가 문화의 도시로 자리를 잡은 역사와 까르티에가 성공한 역사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유럽과 미주의 엘리트와 부자들이 파리에 와서 문화를 소비하면서 까르티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명품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까르티에 본사는 파리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의 도시에서 성공한 회사답게 1984년 예술을 장려하는 까르티에 재단을 설립했다. 장 누벨이 설계한 건물은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로 동시대 예술가를 선보이는 중요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소르본느 대학가의 카페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동네는 ‘라틴구역(Latin Quarter)’이라고 불린다. 오래전 소르본느가 탄생한 중세는 대부분 라틴어로 말하고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지식인/성직자라면 라틴어는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언어로, 마치 오늘날의 영어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래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이 많은 곳이라는 의미로 ‘라틴구역’이 되었다. 지금도 소르본느를 비롯한 많은 대학이 밀집한 곳으로 지식인이 공부하고 놀던 동네답게 오래된 카페가 좁은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다. 카페는 그래서 지식의 전당 뒤에 빼놓을 수 없는 여가의 공간이다.
소르본느 대학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인구감소로 한국의 대학은 구조조정중이다. 미래학자들은 대학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대학은 어땠을까. 원래 대학이라는 개념은 소수의 재능있는 젊은이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은 신학자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1250년대에 설립된 대학이다. 프랑스 혁명,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책을 거치면서 소르본느도 변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문과대학으로 자리잡는다. 다시 1968년 학생운동을 거치면서 파리 대학 시스템 속에 편입되어 지금은 오래전의 영광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다. 사진은 1880년대에 새로이 지은 소르본느 대학 본관.
파리의 오스망 양식 건물
1850년대 파리. 밀려드는 인구와 주거문제, 위생문제를 견디다 못해 나폴레옹 3세는 파리의 도시를 정비하게 된다. 좁은 골목, 오래된 건물을 헐고 넓은 길, 하수도, 공원, 광장 등 프랑스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오늘날 파리의 구도심은 바로 이때 진행한 도시정비의 결과이다. 가로수가 있는 길, 센느 강의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 기차역 광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넓은 대로변 좌우로 늘어선5-6층짜리 아파트 건물이다. 사진 속에보이는 건물이 바로 오스망 양식의 아파트 건물로 1층은 가게, 2층은 가게 주인의 집, 3층부터 중산층이 거주하는 주거공간이었다. 지금은 멋을 추구하는 부자들이 선호하는 아파트가 되었다.
갈레리 베로 도다
1820년대 파리. 하수도와 포장도로도 없고, 중세시대 건물이 그대로 있던 시절, 거리는 온갖 오물의 냄새로 진동했다. 신흥 중산층이 외출해서 갈만한 곳이 많지 않던 당시, 손님들에게 도시의 오물을 피해서 깨끗하고 안락한 쇼핑 거리를 제공한 곳이 갈레리 베로 도다(Galerie Vero-Dodat)이다. 베로 도다는 최초의 아케이드형 쇼핑가로 천정은 유리로 막아 날씨를 막을 수 있었고 좌우로 배열된 가게에서 먹고 마시고, 새로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이후 이 모델은 파리에 널리 퍼져서 1850년대 파리에 150여개의 아케이드가 있었으나 이후 백화점의 등장으로 사양길에 들어섰다.
에펠탑
1890년 파리. 유럽의 제국과 경쟁하면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마침 파리에서 열린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그 자긍심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제작했는데 바로 에펠탑이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던, 소위 19세기판 ‘바벨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탑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지금은 파리와 프랑스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문명과 문화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파리의 아르누보 지하철 입구
1900년 파리. 해가 지지 않은 영국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문화의 도시였다. ‘파리 메트로’라고 불리는 지하철이 생긴 것도 이때이다. 문화의 도시답게 지하철 디자인도 아름답게 만들었다. 공모를 거쳐 선정한 디자이너 엑터 기마르(Hector Guimard)는 지하철 내부는 곡선으로 터널을 만들고 흰색 타일로 마감처리를 했으며 지하철 입구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만들었다. 곡선미가 넘치는 아르누보 양식은 당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프를 우아하게 표현하면서 인기를 누렸던 양식이나 지금은 오래전 파리의 영광을 추억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몽마르트르
19세기 말 몽마르트르는 시골이었다. 가난한 농부와 상인이 살던 마을에 예술가가 몰려온 것은 도시 개발로 파리 시내에서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20세기 전반 미술의 역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러나 가난했던 예술가가 살면서 몽마르트르는 시골 동네에서 파리의 예술가촌으로 변모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는 당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온 관광객으로 붐빈다. 식당, 카페, 기념품점, 교회 등 붐비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100년 전 임대로 들어왔던 예술가 덕분에 온 동네가 문화관광으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주는 곳이다.
피카소 작업실
20세기 위대한 작가로 꼽히며 많은 예술가가 존경하는 피카소가 고향인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온 것은 19세기 후반. 가난한 젊은 예술가였지만 그림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는 파리에서도 변두리였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작업실을 얻었다. 그리고 그 작업실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고 신진 작가의 예술에 관심이 많던 컬렉터의 호감을 얻으면서 이후 승승장구 하게 된다. 사진 속의 건물은 피카소의 작업실이 있던 곳. 지금은 몽마르트르 박물관이 인수하여 역사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1층에 100년 전 살았던 피카소에 대한 설명문이 보인다.
주 드 폼, 파리
주 드 폼은 ‘손바닥 게임’이란 뜻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행하던 실내 테니스 경기를 말한다. 19세기 중반 주 드 폼은 실내 테니스 코트장으로 설립되었으나 1940년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이곳은 테니스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더 유명하게 되었다. 나치는 예술품을 약탈한 후 독일로 가져가 히틀러를 위한 미술관을 지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약탈한 미술품을 잠시 보관한 곳이 바로 주 드 폼이었다. 주 드 폼에서 근무하던 여성 큐레이터 로즈 발랑드는 이곳을 거쳐간 예술품의 목록과 행선지를 비밀리에 기록했고,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이를 추적하여 작품을 회수한 바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은 바로 이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이 건물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오늘날 글로벌 도시라면 오페라 하우스 하나 정도는 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는 그런 오페라 하우스의 원조격이다. 이곳은 ‘팔레 가르니에’ 또는 단순히 ‘더 오페라’라고 불린다. 파리가 문화의 도시로 성장하던 19세기 중반 샤를르 가르니에라는 건축가가 디자인했으며 장식이 많은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웅장한 외관뿐만 아니라 화려한 내부로도 유명한데, 소설 <오페라의 유령> (1910), 이후 뮤지컬로 나온 동명의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오페라 극장이기도 한다. 지금은 과거 제국의 향수를 머금은 곳으로 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나무의 일생
모든 것이 태어나서 사라진다. 귀여운 아기는 성인을 거쳐 노인이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유한한생명을 가진 만물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은 죽은 후에도 쓸모 있게, 아름답게 남는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산 다음에도 예술가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변한다. 씨앗과 뿌리에서 자라서 녹음을 만들다가 죽은 후에는 예술로서 새로운 삶을 갖는 것이다. 인간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영혼이 떠나버린 세상에 아름다운 예술과 감동적인 책과 같은 것으로 남아 지속되지 않을까.
아트 전화부스
상상력은 시작도 끝도 없다. 무한대로 퍼져가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작업하는창작공간에는 모든 것이 상상력의 무대가 된다. 의자, 식탁, 문, 복도 등등. 한 예술가가 전화부스에 에너지를 쏟았다. 한쪽에는 전화기가, 다른 쪽에는 나무가 자라고, 나무 위에는 네온사인으로 된 ‘Art’라는 단어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전화부스 위에 Art가 열렸네….’
뷰티 아티스트
사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사람을 뷰티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아마도 인간의 미를 다룬다고 해서 붙은 명칭일 것이다. 화장술, 헤어 스타일링을 다루는 전문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 미국식 소비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특히 여성에게 경제력을 갖춘 직업군으로 인식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용사나 메이크 업 아티스트는 초기에 헤어 살롱과 같은 작은 규모의 샵에서 조수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보다 본격적인 직업학교의 등장으로 체계적인 과정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MBC와 같은 방송회사도 뷰티스쿨 사업을 벌이고 있다. Change to Artist. ‘예술가로 변하세요.’란 뜻인지 ‘예술가에게 변화를.’이란 뜻인지 알쏭달쏭하다.
장식용 접시
도자기의 영어 명은 china이다. 중국에서 온 물건을 보고 유럽인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도자기 산업은 오랫동안 세계 최고를 자랑했고, 14세기 이후 유럽의 왕실은 중국 도자기를 수입하여 왕실을 장식하기 위해 열을 올리기도 했다. 유럽에서 본 차이나와 같은 도자기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유럽에서 달아오른 도자기 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귀한 도자기를 장식용으로 쓰는 문화는 이후 새롭게 부상한 중산층에게도 퍼져 나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의 수집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장식용 기념품 접시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해서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나 요즘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진은 프랑스 가정에서 수집한 장식용 접시들.
힐링 쇼핑
힐링 바람이 분지 몇 년이 되었다. 힐링 푸드, 힐링 여행, 힐링 산책, 힐링 강좌….끝도 없는 힐링의 바람은 현대인의 황폐한 마음을 보듬어줄 뭔가가 절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 인터넷 쇼핑몰은 드디어 ‘힐링 쇼핑’을 내걸고 광고를 하고 있다. 확실히 카드로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날아온 카드 명세서는 그 힐링이 얼마나 순간적인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래서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는 말한다. 힐링은 순간의 나약함을 채워주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라고.
네모, 블루 스퀘어
2011년 문을 연 한남동의 블루 스퀘어는 짧은 시간 동안 공연장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언덕배기라는 지형탓에 건물의 구조와 동선이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데, 이곳을 핫 플레이스로 만드는 요소는 또 있다. 그 중에서도 2012년 컨테이너 박스 17개를 이용해서 만든 네모(Nemo) 복합문화공간은 단연 눈길을 끈다. 노랑, 주황 등 강렬한 색채로 옷을 입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갖가지 전시가 열리면서 블루 스퀘어의 또 다른 얼굴을 만들고 있다. 임시 물건을 담는 구조물이 변화무쌍한 현대미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논현동에 있는 플래툰 쿤스트할레와 더불어 컨테이너 건축물에 예술을 담은 명소로 자리잡았다.
아트 페어
미술시장이 형성되면서 아트 페어라는 집약된 행사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쾰른, 뒤셀도르프, 바젤 등을 중심으로 아트딜러, 갤러리스트 등이 모여 단기간에 미술품 거래의 장을 만들었다. 1990년대 세계가 글로벌화 되자 유럽식 아트 페어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홍콩의 아트 바젤, 마이애미의 아트 바젤은 이제 스위스의 원래 아트 바젤과 함께 가히 세계 최고의 규모와 수준을 자랑한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서야 KIAF(한국국제아트페어)를 출범시켰다. 최소한 국내외 미술을 전시, 판매하는 미술시장을 만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장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올해 KIAF는 9월 25-29일 사이에 코엑스에서 열린다.
아케이드 시장
길거리에 가게가 즐비하게 생기고 사람들이 분주히 쇼핑하기 시작한 것은 중산층이 대거 출현했던 19세기 말이다. 수입이 증가한 중산층을 상대로 파리와 같은 유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시사철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쇼핑객을 유치하려고 건물과 건물 사이 천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긴 아케이드는 이후 지하상가로, 쇼핑몰로 확산되면서 소규모 점포가 밀집된 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집약적이면서도 효율적인 구조의 상가아케이드는 점차 구식이 되고 있다. 마치 외국의 거리를 걷는 착각을 주는 스트리트형 아케이드가 쇼핑몰, 아울렛이 도입되면서 밀리고 있다.
길거리 수제 햄버거
소고기를 갈아 조리한 후 빵 사이에 넣어먹는 햄버거가 나온 것은 100여년 전 미국에서이다. 샐즈버리 스테이크라고도 불리는 햄버거는 이후 화이트 캐슬, 맥도널드 등 레스토랑 체인이 생기면서 널리 보급되었고 지금은 미국 패스트푸드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6.25 이후 미군을 통해 햄버거가 소개되었고 1979년 국내 최초의 햄버거 가게 롯데리아가 생겼으며, 맥도널드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때 문화를 개방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맞선 수제버거가 서울을 누비고 있으며, 길거리 음식에도 퍼져가고 있다. 태평로의 한 수제버거 가게.
현대 예식장
일제 시대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식 결혼식이 등장한지 90년이 넘었다. 이후 ‘김구 예식부’, ‘만화당예식부’와 같은 전문 예식장이 등장했으며, 6.25 이후 점차 미국문화가 확산되면서 전통혼례식보다 서양식 결혼식이 늘기 시작했다. 베이비부머가 결혼 적령기에 들었던 1970년대 후반 이후 예식장 문화가 널리 퍼져갔으며 그 결과 하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는 보통 한국 청년의 결혼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덩달아 서양식 궁전을 차용한 웨딩홀이 번성했는데 어디의 어떤 곳을 구체적으로 모방했다기 보다는 웅장함과 근사함에 영감을 받아 그럴듯하게 재창조한 공간이라고 보는 게 맞다.
프랑스 수탉 장식품
프랑스 시골집에 빼지지 않는 장식품 중에 수탉이 있다. 일찍 일어나 꼬꼬댁하고 소리내는 영특한 비서역할을 하며, 집에서 기르는 닭들을 통솔하는 가장이 역할도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맹과 부지런함의 상징이 된 수탉은 이후 프랑스 혁명의 깃발에도 등장했고 20세기 레지스탕스 운동을 상징하기도 했다. 교회의 첨탑에 있는 종의 장식에도 사용되었다. 많은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공예품 가게에 가면 여전히 색이 화려한 수탉 장식품이 많고, 박물관에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수탉 조상이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길
사람이 다니는 길이 생기고, 차가 다니는 길도 생겼지만 길의 진화는 끝을 모른다. 사색을 위한 올레길이 생기고 올레길을 추종하는 둘레길 등 다른 길도 생겼다. 그렇게 길은 사람과 함께 진화한다. 길에 사색이 가미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로 삶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느리게 걷는 일이 정신적으로 여유있는 시간으로 부각되면서이다. 19세기 영국인인 바로 그런 여유를 즐기기 시작한 문명인이다. 위대한 철학자들도 길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매일 오후 3시면 마을의 길을 따라 걸었다고 하며, 일본 쿄토에 가면 니시다 기타로가 걷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21세기 문명인에게도 이런 사색의 길이 절실히 필요하다.
절미통
밥을 지을 때마다 어머니는 쌀을 한 줌 덜어 항아리에 담았다. 그 항아리는 부엌 한 켠에 얌전히 있다가 안이 가득하게 되면 시장에서 돈으로 바꾸어 생활용품을 사거나 아이의 학비로 사용하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쌀이 떨어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아껴 쓰는 일이 일상이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널리 퍼지면서 집집마다 꼭 갖추어야 하는 필수 항아리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옹기를 사용했는데 나중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항아리에 절미통이라고 새긴 상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젠 쌀이 남아돌아 더 소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쌀=주요 식량’이던 시절의 유품이다. ‘좀도리’는 전라도 지방에서 부른 절미통의 이름이다.
복개당
유구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많은 종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고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민간에 널리 알려진 무속은 원래 여러 명의 신을 섬긴다. 이런저런 설화의 주인공을 섬기기도 하고 간혹 백성의 존경을 받은 관리나 왕을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서울의 마포 신수동에 있었던 복개당은 역사 속에서 권력투쟁의 상징이었던 조선 시대의 왕 세조를 신으로 섬겼다. 전설에 따르면 손복개라는 마을 사람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집 마당에 걸린 세조대왕의 어진을 모시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세조의 절대권력에 압도되어 나온 조치로 보이는데 안에 모셨던 세조는 문무관을 거느린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고 좌우로 일월도가 배치되어 있다. 1970년대 철거된 영정은 지금 박물관 유물로 전시되고 있다.
하트에 담긴 창의성
시골의 한 식당 벽에 3개의 하트 모양이 자리잡고 있다. 흙이 많은 시골이라 그런지 황토벽에다 가지런히 배열한 하트는 알록달록 앙증맞기까지 하다. 자세히 보면 사은품으로 흔한 라이터가 무수히 자리잡고 있다. 라이터로도 모자라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용 전구와 전선으로 한껏 모양을 냈다. 특별히 이름을 날릴 수 있거나 돈을 받아 팔 수 있는 전시장도 아닌데 가지런히 라이터를 붙이며 혼자 즐거워했을 주인의 얼굴이 그려진다. 아름답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순수한 사랑의 노동의 결과이다. 아마추어(애호가)의 창의성은 이렇게 나온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
건축가는 건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 대한제국의 벨기에 영사관 건물은 손을 많이 탔으면서도 도도하다. 서양인과 일본인이 합작으로 1905년 준공되어 사용되다가 1919년부터 일본기업의 사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본 군대의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고 해방 이후 해국헌병대 건물로 변신했다. 현재 우리은행 소유이지만 무상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임대하여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거쳐갔지만 벽돌과 석재로 된 건물은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100년 전 도도함을 뽐낸다. 건축가가 잘생긴 건물에 담아 놓은 영혼 때문일 것이다.
명동의 밤
명동이 상권이 된 것은 일제시대. 남촌에 사는 일본인이 주로 쇼핑하는 동네, ‘본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미쯔코시 백화점이 들어서고 상권이 자리잡은 1930년대가 되면 당시 경성의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명동에서 외국에서 온 신상품을 사고,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현대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80년이 지난 21세기 명동은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모든 국적의 외국인이 찾아오는 쇼핑의 메카가 되어 불야성을 이룬다. 그리고 가게에는 한국산, 중국산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들이 현대인을 유혹한다.
다문화 서울
글로벌 시대의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세계전역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고 사는 다문화 도시이다. 서울에 온 이유도 다양하다.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여행을 위해, 때로는 결혼 때문에, 또는 정치적 난민이 되어서 등등이다. 이태원은 그러한 다문화 서울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무슬림 교회에서부터 프랑스 빵집, 독일식 식당에, 글로벌 취향을 보여주는 맥주집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언어도 영어, 독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사진은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연 아랍어 수업장면.
봄-복수초
봄을 알리는 식물은 굳은 얼음과 차가운 바람을 견뎌야 한다. 복수초는 눈을 뚫고 자라는 강인한 꽃 중의 하나지만 여름이 오면 더위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우리나라 산야에 야생으로 자라는 복수초는 오랫동안 그저 무심한 눈길을 받으며 약초로 살아남았다. 福壽. 복 복에 장수할 수. 이름에도 아시아인이 애호하는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장식꽃으로 즐겨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최근 야생화 재배 바람이 불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봄-제주 유채꽃
겨자과에 속하는 노란 꽃, 유채꽃이 피는 봄이다. 원래 제주인은 유채 잎과 줄기를 데쳐서 먹고, 씨앗은 기름을 얻는데 사용했다. 이젠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되었는데 제주에서 남해안까지 그 영토도 넓어지고 있다. <제주 서귀포 유채꽃 국제 걷기 대회>는 제주의 봄의 상징인 유채꽃을 보면서 건강한 걷기운동을 접목한 행사로 올해 16회를 맞는다. 이 행사는 몇 년 전부터 부는 ‘올레길 걷기’문화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올해는 3월 29-30일 사이에 열린다.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본 유채꽃 밭.
차길 위의 사람들
길에 사람을 위한 인도가 따로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이다. 중세에는 길이 좁아지면서 인도가 사라졌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말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다시 분리되었고, 19세기에는 늘어난 인구를 소화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도로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차가 달리는 차도가 인도보다 더 넓으며 차도는 감히 보행자가 범접하지 못할 위험한 공간이자 차만을 배려하는 배타적인 공간이 되었다. 예외적으로 축제가 열리면 차도는 잠시 보행자에게 개방되는데 아스팔트 차도 위를 자유롭게 걸으면 왠지 낯설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마도 금지된 공간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디자인을 입은 버스 정류장
우리나라 도시에 디자인을 입히는 운동이 불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간다. 서울을 시작으로 ‘디자인’이 깃든 도시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고 실제로 가시적인 결과들이 나타났다. 간판의 크기가 작아졌고, 대형건물 외벽에는 미디어 작업이 종종 나타난다. 한강 위에는 근사한 랜드마크 건물이 들어서 둥둥 떠있다. 비롯 완전히 사용되지 못하기는 하지만. 디자인 바람은 지방에도 불기 시작했다. 광주, 부산, 청주 등 글로벌 문화 도시를 지향하는 곳에 점점 세련된 디자인이 거리를 덮기 시작했다. 사진은 대형간판을 뒤로 하고 나무를 형상화한 산뜻한 버스 정류장을 설치하는 청주의 모습.
다남 베개
옛날 옛적, 여성이 서당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바느질, 서화로 소양을 닦던 시절, 자수는 거의 필수적인 공예였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일상용품에 자수를 놓았는데 그 중에는 베개모와 베개의 양쪽 마구리도 있었다. 멀리 나가기도 못하고, 기왓집 울타리 안에서 가문이 중시하는 가르침을 받들며 살다가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었고 ‘다남’, ‘자’라고 한자로 새긴 베개를 가지고 시집을 기곤 했다. 아들을 많이 낳아서 남편의 대를 잇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던 시절, 예쁜 꽃 문양과 함께 ‘다남’이라고 새기는 일은 마치도 자신이 부질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다남’이 여성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딸바보’가 유행어가 된 오늘날 ‘다남 베개’는 그 옛날 쓰라린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이 되었다.
혼례용 양초
두 집안의 결합을 알리고 두 남녀의 한평생을 약속하는 전통결혼식은 화려한 물건으로 가득 찬 혼례상을 가운데 놓고 진행된다. 사철나무, 대나무, 동백나무로 장식하고, 청홍색 촛대에 불을 켜며, 봉황을 상징하는 조각품이나 닭 암수 한쌍을 올리기도 한다. 촛대도 그냥 두지 않고 목단무늬와 여러 장식을 혼합하여 경사스러운 날을 기렸다. 목단은 꽃 중에서도 기품있고 아름다워서 문양으로 만들 때 화목과 번영, 부귀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식이 끝나면 친지, 이웃과 잔치를 벌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좋은 날을 축하했는데 오늘날 호텔식 결혼식에 부조금 봉투만 늘어가는 결혼식과는 확실히 격이 다른 시대였다.
야간 조명
사람이 사는 도시에 야간 조명은 오랜 숙원이었다. 기름, 석탄을 이용한 조명을 사용하다가 본격적으로 길거리 가로등에 가스등을 사용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당시 산업혁명의 중심이었던 런던, 파리를 중심으로 가스등이 도입되었고 20세기에 들어 전기등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이 되면 미국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에 조명장식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은 문명의 상징처럼 일본,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에도 널리 확산되어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도시 야간 조명이 다채롭게 사용된다. 하지만 에너지 낭비라는 주장과 도시의 즐거움을 확대하는 장치라는 의견대립은 팽팽하다.
거리의 악사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거리 공연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중세를 거쳐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동안 음악, 연극 등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사람은 거리에 항상 있었다. 거리의 악사는 일본, 중국 등 비서구권 문화에도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길거리 어디엔가 음악소리가 들리고 왁자지껄한 놀이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리공연을 완전히 금지하는 지역이 생기고 등록을 거쳐야 공연자격을 얻는 등 길거리 예술에 대한 대접이 예전과 같지 않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도시는 길거리 예술을 교통질서위반, 소음공해 등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사진은 인사동에서 연주하는 외국인 악사.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
여행을 좋아하는 주인(그를 촌장이라 부른다)은 10년이 넘도록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아직 아프리카를 가지 못해서 언젠가 가리라는 꿈을 가지고 만든 게스트하우스이다. 고향인 제주에 돌아와 만든 게스트하우스는 자유분방한 촌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가구와 인테리어는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고즈넉한 해변가에 있는 이곳을 올레길이 통과하면서 비슷한 취향의 여행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제주에 자리잡은 아프리카 사랑. 문화는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복을 부르는 두꺼비
발가락이 3개인 두꺼비는 복을 불러오고 액운을 제거한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래 두꺼비는 발가락이 4개인데 그 중에 기형인 두꺼비가 복 두꺼비로 둔갑한 것이다. 복 두꺼비 이야기는 행운을 바라는 현대인에게도 매력적이다. 두꺼비 꿈은 길한 꿈이라고 하고 금 두꺼비는 귀한 선물이 되었다. 한 식당 앞에 세워진 두꺼비 조상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앉아 자신의 발가락 3개를 쩍 벌린다. 이 두꺼비를 사진을 보시는 여러분께 올 한해 복이 가득하시길.
예술가의 맛
한동안 인문학 강좌가 유행했고, 예술 강좌도 유행했다. 이젠 ‘융합’의 시대라고 예술과 와인, 영화와 음식, 색과 냄새 등 서로 다른 것들을 결합시키는 강좌, 마케팅이 유행이다. 아마도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의 식당처럼 이 마케팅이 반가운 곳도 없을 것이다. 후기 인상파의 대가 세잔느, 낭만주의 조각의 대부 로댕,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를 주제로 맛과 미의 향연을 소개하는 어느 일본 미술관의 식당. 과연 맛도 3명의 예술처럼 개성이 있을진 모를 일이다.
칼더의 모빌
아이들 방에 하나씩은 있음직한 모빌. 현대미술관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모빌. 장난감이 예술로 변했다. 바로 미국작가 알렉산더 칼더의 이야기이다. 그가 미술을 공부하려고 파리에 머물던 1920년대, 새로운 것이라면 다 시도되고 있었던 이곳에서 주변의 권유로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고, 어릴 적부터 뚝딱거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곧 재주를 인정받았는데 호앙 미로, 피에트 몬드리안 등을 만나면서 점차 움직이는 추상조각으로 분야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빨강, 검정 등 원색 금속판이 매달린 모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사진은 일본의 한 미술관에 설치된 칼더의 모빌.
테쉬폰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 테쉬폰 (Ctesiphon)에는 아치형의 독특한 궁전이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아일랜드계 호주인 엔지니어 제임스 월러(James Waller)가 콘크리트에 천을 첨가하여 철골구조가 없이도 집을 지울 수 있는 기법을 발명하였다. 비용이 적게 들었던 이 기법은 카톨릭 신부들이 전세계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현지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신속히, 저렴하게 개선하는데 사용되었다.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부가 세웠던 제주의 이시돌 목장에는 바로 이 테쉬폰 기법으로 지은 집이 남아있는데 작은 방 몇 개로 이루어진 소박한 집으로 한때 농장의 일꾼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예술가가 되어보세요!
보헤미안과 공예가,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서귀포 예술시장은 호객하는 광고도 남다르다. ‘예술가가 되어보지 않으실래요?’ 이 곳은 창작자들이 물건을 나와서 팔기도 하지만 시장에 들린 사람들이 참여해서 직접 그리거나 만드는 체험형 가게도 있다. 토요일 오후 느릿느릿 나온 사람들과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들이 어울려 적은 돈을 주고 뭔가를 만들어 본다. 아마도 물건을 사는 일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겐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담백한 시간일 것이다. 다음 순서는 돈을 주지 않고서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뭔가를 만드는 것. 완전한 나만의 시간과 체험이다.
거리 시장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탄생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날 교회나 사원 근처에 생기기도 했고 어선이나 상선이 물건을 내리는 항구에 생기기도 했다. 장터가 따로 만들어지자 인근의 온갖 소식과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거래하는 문화가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장터는 정보와 대화의 장보다는 흥정의 장이 되었고 대형마켓이 확산되자 손님을 부르는 종업원의 목소리만 들린다. 이제 장터 만들기는 행정기관에서 도시문화활성화 차원으로 향수와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적 문화사업이 되었다. 사진은 서귀포의 예술가를 위한 길거리 시장.
야생화 정원
자연을 인간에 가깝게 끌어오는 방법 중의 제일 즐거운 일이 정원이다. 한때 서양의 꽃들이 수입되어 우리 정원을 채웠는데 10여년 전부터 야생화를 기르는 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거칠게 자란 녀석들을 사람의 손으로 키우는 일은 세밀함을 요한다. 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빛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시콜콜 알아야 잘 키울 수 있다. 그 개성을 파악한 후 적절한 화분을 맞춰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잘난 척하는 녀석인지, 아니면 수줍어하는 녀석인지 알아야 조화로운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주인의 섬세함이 묻어나는 한 야생화 정원.
아마추어 화가
아마추어는 미숙한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라틴어 amator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원래 ‘애호자’를 의미한다. 그러니 오늘날 수많은 애호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기술과 예술이 발전하는 밑거름이다. 그들이 없다면 몇 명의 프로페셔널만 있는 세계는 황량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한가하게 파도를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의 모습이 한가로워 보인다. 그는 미술시장이 요동쳐도, 가짜와 진짜의 논란도,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고요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저 광활한 바다 앞에서도 여유롭기 그지없다.
옹기 항아리
최초의 농부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들판에서 우연히 곡식을 거두기 시작한 후 먹거리를 보관하려고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불에 굽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옹기가 개발되었다. 불을 땔 때 나무에서 생기는 재가 불길을 따라 옹기표면에 달라붙어 생기는 천연유약은 옹기의 색을 다양하게 만든다. 술, 장을 담그는 발효문화가 널리 퍼지자 옹기항아리의 디자인과 크기도 다양해졌다. 계급사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집안의 장독대를 보면 그 가세를 가늠할 정도였는데, 오늘날 장독대는 고택, 사찰이나 식당 등 사업체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시설이 되고 말았다. 한 식당의 장독대.
대리석
야산을 깎아서 대리석 덩어리를 만든 후 건축물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이다.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장점 때문에 큰 건물의 기둥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이 그 예이다. 원래 흰색의 무결점 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marmaros’에서 비롯된 대리석(marble)은 이후 흰색뿐만 아니라 갈색, 회색 등 온갖 종류의 색을 가진 돌을 말하게 되었다. 성당, 궁전 등 중요한 건물에 꼭 대리석이 들어가자 대리석의 문양은 고급스러움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보통 건물에도 장식용으로 대리석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높은 수요를 맞추느라 합성대리석이 나오기도 했다.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사진 속의 대리석벽은 강남의 한 지하철역의 벽이다.
아치
두 개의 벽을 이은 후 위에서 연결하는 구조를 아치(arch)라고 하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처음 벽돌로 개발한 건축방식이다. 그리고 아치를 활용하여 다리, 건물, 창문 등 온갖 종류의 건물에 응용한 것은 로마인들이다.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아치는 서양건축의 필수요소로 자리잡았고, 아치가 여러 개 연결된 구조를 아케이드(arcad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보행자를 궂은 날씨로부터 보호하는 아케이드는 근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며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쇼핑몰에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철골로 아치를 만들기도 한다. 넉넉하게 퍼진 사진 속의 아케이드는 서울의 한 지하철역의 환승 통로이다.
소금과 돌
예술가는 아름다운 세계만 찾지 않는다. 스스로 성장하면서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예술가도 있다. 김주현 작가는 자연과 생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자연과 생태가 파괴된 세상이라면 인간도, 예술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남도의 염전에서부터 제주도의 돌까지, 버려진 화분에서부터 문명의 찌꺼기인 신문지까지, 이 작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최근 제주도에서 연 전시에는 소금 2톤과 제주도에서 구한 현무암을 가지고 마치 섬들의 바다처럼 만들었다. 얼마나 친환경적인 재료인가!
점집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오늘날처럼 불안감을 친구처럼 안고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불명확한 미래를 알려줄 것만 같은 실마리가 있기는 있다. 오래 전부터 사주, 궁합, 수상, 관상, 해몽 등 온갖 방법이 등장해서 마치 그 실마리를 보여줄 것처럼 인간을 설득한다. 낙원동 길거리의 한 포장마차는 그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사주와 궁합과 같은 오래된 예측에서부터 사업, 승진, 이사, 매매 등 현대인이 궁금한 사안까지 모두 해결해 줄 것처럼 유혹한다.
해주백자
흰색 백자토 위에 푸른 코발트 색으로 문양을 그린 도자기를 청화백자라고 한다. 중동에서 개발된 푸른 염료는 9세기경 중국에 수입되었고 이후 14세기경 처음으로 세련된 청화백자가 탄생했다. 한국은 왕실의 주도하에 15세기경에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왕실에서 관장하던 도화서 화원의 화가가 도자기 위에 풍경, 꽃 등의 그림을 그려 넣어서 당대의 취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19세기가 되면 도자기 산업도 민영화되기 시작해서 해주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도자기는 약간 투박하면서도 호방한 문양과 형태를 보여주는 해주의 청화백자이다.
재활용 벤치
환경보호와 에너지 절약이 시대의 화두인 오늘날 일상에서 쓰는 가구도 지속가능성을 표방한다. 반짝반짝, 세련된 재질로 만든 근사한 가구가 아니라, 재활용한 재료, 재활용 가능한 재료, 자연자원을 절약하는 재료로 단순한 기능을 강조한 가구가 나오고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벤치는 그러한 재료로 만든 가구로 소박하면서도 검소한 정신을 보여주는데 안락함이나 편리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녹색 시대에 인간이 지구보호라는 대의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이다.
가게 앞의 홍보원
새로 출시된 상품을 알리는 홍보원이 열심히 몸을 숙이며 인사한다. 자세히 보면 전동장치가 달린 마네킹이다. 마네킹이 가게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유럽. 19세기엔 파리의 가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오늘날도 패션과 관련된 가게에 필수적인 물건이 되었다. 드디어 서울의 한 핸드폰 가게에도 마네킹이 등장해서 상냥하게 들어오라고 권하고 있다. 그런데 상냥한 홍보원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짧은 스커트에 날씬한 몸매. 2013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한국의 세계 양성평등 순위는 136개국 중 111위로 아랍국가와 유사한 수준이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답게 감성노동자의 전형도 여성이다.
녹색 건물
문명사회에 에너지 위기가 닥친 후 에너지를 줄이고 환경에 피해를 덜 주는 녹색 건물(Green Building)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는 녹색 시대라고 할 정도로 에너지 효율성, 건물의 크기 및 디자인, 물, 쓰레기, 운영비 등에 있어서 효율성이 높은 건물을 장려하고 있고 이제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건물외부를 풀로 덮거나 실내에 정원을 들여서 건물온도를 조절하거나 태양광을 도입하는 등의 기술이 널리 퍼지고 있다.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의 한 유명 호텔도 녹색 시대에 맞게 외관에 초록을 입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산소를 내뿜는 풀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이다. 아마도 녹색 시대에 동참하려는 마음만 앞섰던 모양이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지난 9월, 강북에 새로운 문화시설이 생겼다. 문화향수 기회의 확대차원에서 서울시에서 설립한 북서울 미술관이다. 시청인근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면 하계역에서 가까운 강북의 공원에 북서울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벌써 이 동네의 명물로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가족 단위로 온 관람객들로 붐빈다. 지하의 강의실에는 교육프로그램, 심포지엄, 강연회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으로 계산한 수 없는, 그러나 행복하고 건강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예술 경험의 확대를 위해 공적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즉각적인지 잘 보여준다.
무라카미의 가벼운 예술
만화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는다. 일본의 만화문화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데 일본작가 다카시 무라카미는 어른이 되서도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고 만든 캐릭터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 즐거움을 예술작품으로 담아낸다. 미술학 박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그러한 자신의 미술을 ‘수퍼 플랫 (super flat)’이라고 명명했다. 최고로 가벼운 미술이라는 뜻이다. 만화처럼 가볍게, 무겁지 않게. 예술도 삶도 항상 무겁기만 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우스 갤러리
갤러리는 예술을 파는 가게를 말한다. 과거에는 보통 가게자리에 근사하게 꾸민 갤러리가 들어섰었는데 지금은 온갖 장소가 갤러리로 변한다. 그동안 정미소, 다방, 목욕탕 등 기존의 기능이 다한 공간을 예술공간으로 바꾼 사례가 있었다. 청담동 갤러리 타운에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가 2006년 들어섰다. 주인의 이름을 따서 유진 갤러리라고 명명했는데 전시, 아트 컨설팅 등 사립화랑이 보통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부동산 가격이 높은 동네의 집을 개조해서 그런지 뭔가 달라 보인다.
밥솥 아트
평범한 것을 색다르게. 진부한 것을 새롭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치기 어린 장난에서부터 진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온갖 실험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예술이다. 밥솥에 예술을 입힌다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예술가들에게 구형 밥솥을 주고 아무거나 해달하고 했더니 형형색색 얼굴로 단장을 시켜놓았다. 맛있는 밥을 먹고 싶은 솥이 아니라 눈요기, 감상거리로 변해버렸다. 이제 밥솥은 사라지고 볼거리 예술, 근사한 오브제가 등장했다.
대나무 벤치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다년생 풀 대나무의 종류만도 1450가지나 된다고 한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주요한 자원인 대나무는 호주 북부,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자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아시아문화는 대나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장비로 쓰기도 하고 무기, 가구, 서예도구, 그릇, 음식재료로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길고 오래 자라는 성질을 높이 사서 장수의 상징이기도 하여 그림에도 많이 등장한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대나무를 활용하여 만든 예술적인 가구.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으니 벤치와 평상 중간 정도 되겠다.
대나무 바구니의 변신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대나무. 쑥쑥 자라 하루에도 수십 센치에서 1 미터 씩 자라는 대나무는 총 60 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잘 자라고 사시사철 푸르러 보기에도 좋고 쓰임새도 좋아 사람에게 유익한 식물이 아닐 수 없다. 대나무를 가지고 물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수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바구니, 차 도구, 부채, 가구 등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종류도 다양하다. 최근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선보인 바구니를 이용한 설치작업. 물건을 담는 용기를 거꾸로 매달아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다니 마치 버섯무리처럼 살아있는 것 같다.
샘소나이트 여행가방과 예술가가 만나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여행 가방으로 유명한 샘소나이트. 1910년 미국 덴버에서 처음 시작된 회사로 성경에 나오는 거인 삼손을 따서 가방의 브랜드 명칭을 만들었다가 1941년 샘소나이트(Samsonite)로 바꿨다. 이 회사는 여행인구가 증가하면서 찢어지지 않고 가볍고 튼튼한 가방이 필요해지자 크게 성장했다. 한 때 미국시장을 주름잡았지만 지금은 해외에 공장을 두고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여행가방의 디자인에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입히는 것도 그런 영업의 일환이다. 2012년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에 갤러리들과 나란히 부스를 열고 예술작품처럼 여행 가방을 전시하자 특이한 상품을 좋아하는 관객의 발이 끊이지 않았다.
도심의 고물상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사람이 지나간 곳에는 꼭 부산물이 남는다. 쓰다버린 종이, 책상과 의자, 헤어 드라이어, 세수대야 등등. 어떤 것은 그대로 버려지기도 하지만 그중에서 자원으로 재활용할 만한 것을 골라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고물상은 쓰고 버리고 처리하는 관계를 만들어왔다. 최근 이런 고물상이 폐기물에서 나온 중금속 때문에 토양 오염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환경부는 폐기물관리법을 만들어 고물상을 관리하기 시작했는데 전국의 고물상 주인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 법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진다고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건강한 환경과 지구의 자원보호를 위해 법도 필요하고 고물상도 필요하다. 슬기로운 해결책이 절실하다. 세련된 주상복합 건물 바로 옆에서 할 일을 다하는 고물상의 모습.
소리박물관, 서귀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체험경제가 문화를 강타한지 꽤 되었다. 어디를 가도 체험을 외친다. 음식체험, 신상체험, 딸기 따기 체험 등등.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만지지 말라는 경고를 보면 움츠려들다가도 체험할 수 있다는 곳이 있으면 쏜살같이 모여든다. 만지고 듣고, 누르고, 먹어보고 입어보면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도 체험하고, 지식을 쉽게 향유하면서 만족도 얻는다. 그러니 박물관 마케팅에도 체험 프로그램은 필수가 되었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기회 만들기. 입장객 수가 박물관의 성패를 가늠하는 시대에 사람을 부르는 방법은 당분간 계속 인기를 누릴 것이다.
메르츠바우, 하노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예술가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물건에도 적잖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 특별히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창의성의 발현 그 자체 이외에는 별 목적이 없다. 20세기 초 일련의 작가들이 그렇게 별로 쓸모가 없는 물건을 모아 창의적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이다. 그의 작업 중에서 독일 하노버의 자신의 아파트를 추상적인 구조와 물건으로 채워 넣은 메르츠바우는 단연 압권이다. 나치를 피해 떠난 1937년까지 14년 가까이 매일 자신의 집이자 작업실의 구조를 바꾸면서 건축, 설치 등 어떤 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종합예술작업을 만들었다. 하노버의 스프렝겔 미술관에 설치된 메르츠바우.
제천 리솜 포레스트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리조트가 ‘힐링’을 품었다. 해발 500미터의 높은 산 속에 위치한 리솜포레스트는 맑은 공기 속에서 쉴 수 있도록 설계된 곳이다. 커다란 건물에 호텔처럼 수백 개의 방을 만들었던 과거 리조트와 달리 빌라처럼 독립된 건물 200여 채에서 숙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파, 식당, 카페의 메뉴도 모두 건강과 치유를 지향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주중에는 바쁜 도시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고즈넉한 산속에 들어와 가파른 언덕과 숲속을 거닐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모델이다. 세련된 건축과 조경덕분인지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인지 국내 유명 드라마와 잡지에 자주 소개되기도 한다. 카페에서 본 풍경.
영월 한반도 전망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수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한반도일까. 산세가 좋고 석회암 등 자연자원이 풍부한 영월에 한반도 모양과 흡사한 지형이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한반도 섬이 있다. 영월의 지형은 자연적인 풍화에 의해 깎인 산이 한반도 모양을 형성하고 있고, 양구의 섬은 습지를 개발한 호수 내에 인공적으로 만든 섬으로 양구군이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테마형 섬이다. 영월의 한반도는 자연의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비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고 양구의 한반도는 인간이 가진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동강국제사진제, 영월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동강사진박물관은 지방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수준 높은 전시로 유명하다. 바로 한국사진계의 전문가들이 운영과 작가선정에 대해 조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설전도 볼만 하지만 2002년부터 시작된 동강국제사진제는 올해 12회째를 맞는다. 가난한 영월군의 예산에 비해 전시의 질은 가히 국제적이다. 외국현대사진의 흐름을 보여주고, 유망한 사진작가를 선정하여 상을 주기도 한다.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이 사진제와 인근 문화유적을 보기위해 영월군 인구보다도 더 많은 수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문화가 일으키는 작은 변화이다.
동강사진박물관, 영월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과거 강원도 영월에는 탄광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도 17만이 넘는 사람이 북적이던 곳이었지만 탄광이 사라진 지금은 간신히 4만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고 노인 자살률은 전국 상위권이다. 경제가 동력을 잃고 마을은 성장하지 않자 영월은 10여년 전부터 문화자산을 활용한 새로운 도약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단종의 묘, 김삿갓 유적지뿐만 아니라 새로이 곤충박물관, 아프리카미술박물관, 동강사진박물관 등 16개의 박물관을 지어 ‘박물관 고을 특구’로서 관광객 유치에 공들이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이 한국 최초의 공립 동강사진박물관으로 한미약품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서울 송파구의 한미사진미술관과 함께 유일하게 사진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곳이다. 영월군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가을 고추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6세기경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추는 한국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매콤하면서 달콤한 고추장은 어디에도 없는 한국의 문화이다. 태양초. 언제부터인가 햇볕에 빨갛게 익고, 다시 햇볕에 잘 말린 고추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어딘가 마케팅 냄새가 나는 단어이긴 하지만 정감이 가는 말이다. 가을이 오면서 고추를 재배하는 집마다 태양초 말리기에 한창이다. 아직은 초록색인 꼭지와 잘 익은 붉은 색이 보색을 이루며 고혹적인 고추의 자태를 뽐낸다. 언젠가 그 고추로 만든 고추장을 먹는 날을 상상하면 자연에 감사하게 되는 계절이다.
가을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사람이 자연을 길들이기 시작한 이래로 정원은 가장 인간적인 자연이 되었다. 자연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랄 수도 있는 나무를 가지런히 배열하고, 형상을 만들어내는데 마치 잘 깍은 사람의 머리를 보듯이 잔가지를 정리한다. 유럽의 수도원이나 왕실의 유명한 정원은 대부분 이런 정리와 장식을 거친다. 때로는 가지정리를 넘어 식물의 색, 꽃의 색을 고려해서 정원의 배치를 질서 있게 만들기도 한다. 주변 건축의 형상과 색채와 어울리게 배치하기도 하고, 조각상이나 예술작품을 배열하기도 하는데 거의 예술의 경지에 와 있다. 사진은 서양의 정원술을 응용한 통영 외도의 정원.
일본 가정의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황실, 귀족, 사찰 등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일본인들은 모두 정원을 좋아했다. 중국에서 수입한 정원 문화에 불교의 사상과 융합하여 일본식 정원문화를 만들어 냈고 오늘날 세계에 뽐낼 만한 문화를 구축했다. 그러나 귀족이나 부자와 달리 평범한 일반인에게 정원을 만들 땅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한그루, 꽃 몇 송이를 즐기려는 마음까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사진에 보이는 모습은 작은 다다미 건물 앞 주차장 공간을 쪼개서 만든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인간은 더 창의적으로 변한다.
교토 인화사(닌나지) 금당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9세기 말 설립된 교토의 인화사는 수백 년간 일본 황실의 일원이 주지를 맡아온 절이다. 심지어 우다 황제는 왕위를 버리고 이곳의 주지스님이 되었을 정도로 일본 황실과 인연이 깊다. 그래서인지 황제가 방문했을 때 거처하는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5층 목탑, 금당 등 들어선 건물 모두가 타 사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중에서도 금당은 실제 황실에서 사용하던 건물을 1637년에 옮겨와 본당으로 만든 것인데 고대 백제의 건축을 수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6세기부터 수입한 한국의 넉넉한 곡선과 안정된 구조가 일본 황실의 절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문화의 흐름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토 용안사(료안지) 호조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용안사 바위정원으로 들어가려면 ‘구리’라고 불리는 건물을 통과한 후 이어진 ‘호조’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고즈넉한 정원이 보인다. 원래 구리는 부엌이 있는 살림공간이고 호조는 선불교 승려가 거처하던 건물로 손님을 맞는 용도로 쓰이는 넓은 다다미 방이 여러 개 연결되어 있다. 선불교 승려는 호조의 다다미 방을 둘러싼 여러 문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남쪽으로 난 문을 열고 바위정원을 보면서 명상할 수 있다. 후수마에라고 불리는 문그림은 원래 중국회화의 영향을 받았다가 점차 일본식으로 자리잡았는데 금박으로 칠한 화려한 그림부터 단순한 수묵그림까지 다양한 양식을 사용한다.
교토 용안사(료안지)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귀족의 집에는 정원이 꼭 달려 있었다. 그냥 정원이 아니라 당시 선불교의 영향으로 극락을 표현한 정원을 만들곤 했다. 극락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오늘날 유명한 절과 정원은 그렇게 만든 귀족의 집과 정원이 용도를 바꾼 것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숲처럼 자연의 모든 것을 담은 정원도 있지만 인구가 늘면서 정원은 축소되기 시작했고 일부 정원에서는 추상적으로 거친 돌, 이끼 덩어리, 나무 몇 그루로 극락의 핵심을 담아내기도 한다. 용이 평온하게 있다는 의미의 용안사의 바위정원은 15세기 일본의 대표적인 선불교 정원으로 작은 자갈돌이 곱게 깔린 위로 바위 15개가 작은 산처럼 서있는데 그 단순미, 절제미가 빼어나다.
교토 금각사(킨카쿠지) 정원의 부처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천국과 지상의 조화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킨카쿠지는 번쩍이는 건물보다도 천천히 걸으면서 음미할 수 있는 정원이 더 아름답다. 작은 폭포, 잘 다듬어진 나무들을 따라 걷다보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는 것 같다. 그중에도 오래된 돌부처 군상은 ‘금각사’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하기 그지없는 부처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을 빌며 부처 앞에 놓인 돌 바구니에 동전을 던진다. 로마의 분수대, 청계천의 돌다리 등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곳이면 어디든지 동전을 던지는 연약한 우리의 초상이다.
교토 금각사(킨카쿠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일본을통치했던 아시카가 쇼군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미츠는 11세에 부친을 여의고 3대 쇼군이 되었다. 1394년 다시 9세 된 아들에게 쇼군의 지위를 양위한 요시미츠는 은퇴 후 조용히 불교를 공부하면서 거처할 빌라를 구입했고 1408년 사망하면서 선불교 사찰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찰이 교토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킨카쿠지 (금각사)이다. 사람들은 아미다 부처의 천국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정원보다 ‘거울 연못’옆에 당당히 서있는 금박으로 도배된 3층 건물을 보면서 죽음 이후의 천국보다는 번쩍이는 현세에 더 관심이 많다.
교토 은각사(긴카쿠지) 정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미니멀리즘. 최소의 것에서 가치를 찾는 사고이다. 일본 선불교는 언어, 사고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를 장려하는 미니멀리즘 철학을 실천한다. 쿄토 긴카쿠지의 모래정원은 명상과 관조를 강조하는 일본 선불교의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선불교의 정원에는 모래, 돌, 자갈 등 자연재료와 함께 풀, 나무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전통을 독특하게 지키고 있다. 가지런한 써레질과 밭처럼 이랑이 반복되는 모습 한 켠으로 작은 숲처럼 만든 나무와 돌, 그리고 이끼는 낯설면서도 시공을 초월한 예술처럼 보인다. 한쪽 코너에는 ‘달을 보는 관망대’라고 불리는 모래구조물이 원뿔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후지산을 닮았다고 한다.
교토 은각사(긴카쿠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전통과 문화를 자랑하는 일본 교토에는 사찰이 넘치고 그 사찰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빼어난 정원으로 유명한 긴카쿠지는 원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은퇴한 후 살기위해 1482년 지은 집이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절이 되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건물과 나무, 모래정원과 이끼정원이 유명하다. 섬세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절의 분위기는 전통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쇼군의 정신을 잇고 있기 때문이며, 결국 선불교의 중이 된 쇼군이 교토의 희노애락을 멀리하고 툇마루에 앉아 나무, 모래, 연못, 목조 다리, 이끼 등 작은 것에서도 우주를 찾았던 철학 덕분이다. 눈이 닿는 곳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교토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지주신사(지슈)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기요미즈데라에는 여러 개의 건물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랑과 좋은 인연을 찾아주는 신을 모신 지주신사이다. 과거에 고즈넉한 본당에 저마다 바라는 바를 기원하려고 찾아왔다면 오늘날 이 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짝을 찾지 못한 젊은 남녀가 찾아오는 지주신사이다. 특이 신사 마당에는 돌 3개가 6미터 거리에 세워져 있는데 눈을 감고 그 사이를 성공적으로 걸으면 짝을 찾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반신반의하면서도 걸어보는 현대인의 모습은 초자연적인 힘이 있기를 바라는 디지털 인간의 아이러니이다.
교토 청수사(기요미즈데라)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일본 교토는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치적, 문화적 수도이자 지금도 1600개가 넘는 절이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798년에 세워진 기요미즈데라는 오랫동안 일본 불교의 상징으로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33년 지금의 모습으로 지은 건물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짓는 일본 목조건물의 정수를 보여주며 특히 절벽아래 13미터 높이와 연결된 목조구조는 본당을 지탱하는 기초인데 그 기술도 놀랍지만 푸른 산과 물에 둘러싸인 채 문명과 자연의 가교로서 묵묵히 버티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본당의 모습이다.
상하이 예술발전소의 앤디 워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전기를 생산하던 생동감 넘치는 발전소가 현대미술의 창의성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상하이 예술발전소의 내부는 높은 천정, 각층의 구분이 모호한 공간배열로 현대작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번 여름 예술발전소에 미국작가 앤디 워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미국의 소비문화와 대중매체를 영리하게 차용했던 워홀의 작품을 중국 최고의 소비도시중의 하나인 상하이에서 만나는 것은 글로벌 시대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상하이 예술발전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상하이에 오래된 발전소가 있었다. 1897년 청나라 말기에 세워진 이 발전소는 오랫동안 상하이에 전기를 공급해 왔다. 1985년에는 165미터가 넘는 높은 굴뚝을 추가하여 웅장한 공장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근대 상하이의 흥망성쇠를 다 보고 겪은 증인이다. 중국정부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위해 이 건물의 내부를 개조하여 ‘미래관’으로 사용했다가 엑스포 이후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예술발전소’로 지정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낡은 건물을 개조하여 문화공간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곳도 그런 트랜드를 반영하고 있다.
M50의 한 갤러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M50의 갤러리들을 보면 중국현대미술 향수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Shanghart Gallery처럼 1990년대부터 국제적인 미술을 선보이는 유서 깊은 화랑이 있는가 하면 마치 대량생산한 것처럼 알록달록한 그림을 싼 값에 파는 상업 화랑도 있다. 이곳의 한 신생 화랑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국가의 젊은 작가 작품을 모아서 전시를 하고 있다. 좌대위에 전시된 계란모양의 흰 덩어리들은 솜으로 된 두상으로 한국작가 김순임이 제작한 작품이다.
M50, 상하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상하이 모간산로 50번지는 과거 공장과 창고지대였다. 낡은 건물 탓에 싼 임대료에 반한 예술가가 모여들면서 예술가 작업실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0여년 전이다. 지금은 작업실, 갤러리, 소규모 창조산업체, 카페 등이 모여 형성된 문화지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며, 여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는 곳이다. 베이징에 798 지구가 있다면 상하이에는 M50이 있다고 보면 되는데 그래서인지 상하이에서 꼭 경험해야 하는 장소 10곳 중의 하나로 꼽힌다.
중화예술궁의 전시작품, 상하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중화예술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수한 사실주의 회화와 조각이다. 보통 ‘사회주의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이 양식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중화예술궁에는 특히 중국의 근현대사, 인민해방의 역사에 관련된 회화가 많은데 주로 마오쩌둥의 홍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대부분의 작품의 크기가 엄청나서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압도한다. 중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거대한 조각상 앞에서 작품 설명을 듣고 있다.
중화예술궁, 상하이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10년 상하이 엑스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더불어 21세기 중국의 문화, 경제 수준을 보여주는 대형 이벤트였다. 당시 30억 달러를 투자하여 528 헥타르의 면적에 각국이 전시관을 지어 경쟁하는 지상최대의 쇼를 열었었다. 그때 중국관으로 지어진 건물이 사진속의 빨간 건물이다. 160,000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에다 지상에서 49미터 높이의 건물로 굵은 붉은 색 선이 인상적이다. 엑스포가 끝난 후 이 건물은 2012년 ‘중화예술궁’으로 전환되었는데 기존의 상하이 미술관의 컬렉션과 중국의 근현대 작품을 모아 만든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한 나라의 문화의 척도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라오창팡 내부, 상하이
상하이의 화려한 근대역사를 보여주는 건물 라오창팡의 개조는 내부의 시멘트로 된 복잡한 구조와 기존의 동선을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식 조명, 화장실 등 일부 시설이 추가되었다. 소들이 이동하는 동선과 사람이 이동하는 동선이 구분되어 있는데 지금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 신비롭다. 2층에는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 클럽이 들어서있고, 고급 식당, 작은 공연장도 들어서 있다. 건물을 개조하자마자 입주율은 30%에 불과했으나 조금씩 상하이의 보헤미안 문화를 즐기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가게와 식당들이 들어오고 있다.
라오창팡, 상하이
1930년대 상하이는 외국이 문물이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코스모폴리탄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한 30년대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곳 중의 하나가 라오창팡 도살장이다. 영국의 한 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은 시멘트 및 모든 재료를 영국에서 수입해서 지었다고 한다. 근사한 외관에 비해 내부는 기본적으로 도살장으로 가기 전 소들이 머물던 임시 거처로 특이한 것은 두터운 벽이다. 또한 햇빛의 적절한 조절 때문에 지금도 에어컨 없이도 항상 서늘하게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2007년 상하이 도심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역사적 건물을 개조, 복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라오창팡은 도살장의 역사를 딛고 공연장, 클럽, 식당, 스튜디오 등 다양한 문화, 상업시설이 들어선 라이프스타일 쇼핑몰이자 복합공간으로 변모했다.
상하이 푸동
상하이 번드 바로 맞은편에 있던 어촌 푸동은 지난 20년간 상하이의 자존심으로 떠올랐다. 1993년 특별경제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황포강 동쪽에 위치했다 해서 푸동이라고 불리는데 그동안 수많은 최고층 건물이 즐비한 금융, 비즈니스 지구로 성장했다. 상하이 주식거래소, 동방명주라고 불리는 타워 등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즐비하고, 지금도 드래곤 타워가 한참 올라가는 중이다.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를 흡수한 이곳의 야경은 마치 21세기판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이국적이며 화려하기 그지없다.
상하이 번드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개항을 하자 그 바람을 타고 상하이에 세계 열강이 들어오면서 조용하던 황포강가의 어촌은 외국인을 위한, 외국인의 의한, 외국인 상업, 거주지역으로 변모했다. 번드(Bund)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한 때 외국계 은행, 사업체로 붐비는 아시아의 세계주의 현장이자 유럽의 건축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1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서양식 건물은 이미 중국은행이 차지하고 있고 그 위로 중국국기인 오성홍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중국과 전세계에서 온 또 다른 외국인들이 번드를 거닌다.
음악 케익
티라미수의 맛은 달콤하면서 느끼하고 동시에 쌉싸름하다. 사보야르디 비스켓, 계란 노른자, 치즈, 코코아, 럼이나 와인 등을 재료로 만든 이 케익은 원래 이탈리아에서 처음 선보였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논쟁중이지만 1980년대 이후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티라미수를 번역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이다. 그래서인지 한 카페에서 주문한 티라미수 옆에 높은음자리표가 초콜렛으로 그려져 있다. 케익을 준비한 전문가가 솜씨를 뽐내며 그린 음표는 마치 달콤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 같다. 작은 티라미수 한 조각에도 이렇게 창의성을 입히는 이들이 바로 창조적 인간이다.
바쁘니까 청춘이다
새 드링크 음료가 나왔는지 홍대입구 지하철역 광고판에 크게 도배되었다. 에너지 넘치는 푸른색의 드링크 위로 “바쁘니까 청춘이다”라는 문장이 지나간다. 작년 우리나라 청년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차용해서 살짝 비틀었다. 성공신화에 물든 사회에서 미래를 걱정하는 세대에게 주는 조언을 모았던 책인데 광고에서는 나약한 청춘이 아니라 피가 솟구치는 청춘을 부르고 있다. 아파도 청춘이고, 당신의 생물학적 나이가 얼마이든지 상관없이 매일 바쁜 삶을 살고 있어도 청춘이다. 기왕이면 바쁜 청춘이 낫지 않을까.
청파동 가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서울 청파동은 과거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동네로 지금도 일본식 가옥이 조금 남아있다. 이후 빌라, 연립주택, 원룸 등 온갖 건물이 들어서서 외관은 많이 변했지만 소규모 단위의 택지에 지은 나지막한 집들은 과거 이 동네의 모습이 어땠는지 짐작케 한다. 낡은 집에 거주하면서 재개발을 기다리는 주민도 많지만 오히려 개발하지 않은 지금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재개발이 늦어지는 동안 그 더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길가의 가게는 계속 변신한다. 여대 근처라 유행에 민감한 앙증맞은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저마다 개성이 넘친다. 작은 옛 주택을 개조한 코너의 가게는 핫핑크로 단장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신사동 가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도산공원 인근에는 유독 명품가게가 많다. 에르메스, 랄프 로렌 등등. 뿐만 아니라 갤러리, 아트 센터, 고급식당도 있다. 가히 강남스타일로 넘치는 곳이다. 그런 강남스타일에 도전하듯이 에르메스가 있는 골목에 <맛다방>이라는 가게가 있다. 고급스런 동네에 일부러 튀려고 허름하게 꾸몄는지 건물재료도 대충 사용한 듯하다. 지붕의 시계는 퇴근 후 들리라는 듯이 6시 10분을 지나 멈춰있다. 정겨운 옛날 가게를 생각나게 하는 이곳은 외관에 어울리게 순대볶음, 김밥, 라면, 떡볶이, 막걸리 등을 착한 가격에 팔면서 시간을 보낼 손님을 기다린다.
섭지코지 성당
제주의 성산포 인근 섭지코지에는 호젓한 성당이 서 있다. 바람부는 언덕에 고즈넉이 서있고 주변에는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구성된 정원도 있다. 혹 올레길을 걷다가 이 성당이 보이면 들어가서 잠시 기도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단아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은 진짜 성당이 아니다. 배우 이병헌과 송혜교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올인>에 사용되었던 무대세트이다. 자세히 보면 창문도, 벽도 어딘지 가벼워보인다. 한때 태풍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지어 드라마 전시장, 웨딩하우스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드라마처럼 잊혀진 곳이자 상상의 드라마에서 따온 가짜성당일 뿐이다.
서울의 풍경
조선시대, 일제시대, 그리고 급속 성장을 이룬 1970, 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의 풍경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종로에서 떡을 사먹던 어릴 적 기억이 그대로인데 오늘날 서울의 삶은 프랑스산 와인을 기울이면서 사교를 해야 하고, 외제차를 뽐내며 탈 정도로 라이프스타일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 성장의 속도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디자인 서울’을 외치며 도시의 간판을 거의 다 바꿀 정도의 바람이 분지도 꽤 지났건만 강북 어느 동네의 닭집 간판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주인이 직접 쓴 글씨간판이다. 기계가 세련되게 만든 간판이 넘쳐나는 오늘날 손글씨로 쓴 간판이 달콤한 미소를 짓게 한다.
서울의 변화
서울은 빠르게 변한다. 고령화, 저성장 등 비관적인 뉴스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정체된 도시라기보다는 빠르게 변하는 도시이다. 스타벅스 등 글로벌 브랜드뿐만 아니라 서울의 중심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계 식당이 점차 동네골목으로 들어오고, 우리의 입맛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상식도 바꾸고 있다. 중국식당, 일본식당은 기본이고 베트남, 태국음식은 이제 흔히 볼 수 있으며, 몽골, 인도, 터키의 음식문화도 들어오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아시아 아시아>식당은 인도식 커리와 난을 맛볼 수 있는 인도식당이다. 이국적 간판을 통과해서 타지마할이 그려진 실내에서 먹는 이국적인 음식은 글로벌 시대의 서울의 맛이기도 하다.
망치질하는 사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수직의 고층건물 사이에 고개를 숙인 거대한 검은 조각상이 망치질을 하고 있다. 미국작가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높이 2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으로 작가는 1979년 처음 만들 때 근로자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이기에 전 세계에 같은 조각상을 여러 개 만들어 퍼뜨리고 싶었단다. 지금까지 <망치질하는 사람>은 서울뿐만 아니라 로스엔젤레스, 시애틀, 달라스, 바젤, 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도시에 우뚝 서서 묵묵히 망치질을 하고 있다. 마치 저 건물 속에서 근무하는 무수히 많은 근로자들처럼.
제주 애서원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밭과 숲만 펼쳐진 곳에 애서원이 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미혼모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임애덕씨가 2003년 만든 미혼모 입소 시설이다. 미혼으로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이곳에 와서 출산을 하고 출산 후 일정기간 동안 사회 재적응과 자립을 위한 교육을 받은 후 사회로 나간다. 대부분의 입소자는 제주가 아닌 타지에서 온 젊은 여성들.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집을 짓자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자원봉사를 하며 도움을 준다. 세상은 이렇게 착한 사람들 덕분에 바르게 돌아간다.
청파동 프로젝트 141의 마지막
<양은희의 시각문화 이야기 16>에서 소개했던 개념있는 가게, 프로젝트 141이 최근 문을 닫았다. “쇼핑은 정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정무역 커피를 2000원에 팔아 그중 일부를 유니세프에 기증하려고 열었던 가게이다. 주인 한재우씨는 1.3평 가게 월세 55만원. 기타 부대비용을 감당하면서 1년 2개월간 운영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한때 커피 40잔을 팔기도 했지만 인근에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늘어가면서 하루에 2-3잔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주인은 문을 닫으면서 착한 가게 주인답게 감사의 말을 남기고 갔다.
몽인 아트 스페이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신당동에 한 재벌 창업주가 살던 집이 있다.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소박하고 그냥 보통집이라고 하기에는 넓은 정원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주인 애경그룹이 이곳을 개조하여 작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 <몽인 아트 스페이스>로 만들어 개방한 것이 2007년. 1, 2층에 작업실이 있고, 주방에는 간단한 요리도 할 수 있다. 그동안 국내외 유수의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고, 지금도 4-5명이 작가가 작업실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정원에 나와 담소를 나누며 창작의지를 다진다. 최근에 서울에 불고 있는 오래된 것을 활용하여 문화공간으로 가꾸는 보헤미안 문화는 대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문화역 서울 284>에서 열린 ‘여가의 새발견’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예술가, 취미 동호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을 전시로 만들었다. 그 중 한 전시장에는 베어브릭, 코카코라 병, 장난감, 스타벅스 텀블러 등 자신이 좋아하는 사물에 꽂혀 수집하는 이들의 컬렉션을 전시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것이 스타벅스 텀블러 컬렉션이다. 수십 년 동안 수만 점을 모으는 사람은 분명 그냥 굴러다니거나 지나치는 물건에도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분신을 찾은 것처럼 열정적으로 모았을 것이다. 그래서 모은 물건을 보면 그 주인의 마음과 욕망이 보인다.
텐트 전시
<문화역 서울 284>에는 4월 14일까지 ‘여가의 새발견’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예술가, 취미 동호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을 전시로 만들었다. 그중에서 사진에 보이는 전시장은 ‘Soul Camper Seoul'로 빠르게 성장하는 캠핑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뿐만 아니라 여러 장비 업체가 참여한 공간으로 마치 캠핑용품 전시장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이 살다보면 상품과 여가생활, 미술과 대중문화의 접점에서 특별한 생각보다 그저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런 여유있는 삶을 전시장에서 맛볼 수 있다.
문화역 서울 284
일제 시대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자 수요에 맞추어 1925년 경성역이 새로 건설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만주로 사람을 싣고 달리는 기차 정거장이었으나 사실은 일본이 부산에서 경성을 거쳐 모스크바,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철도 교통망 구축시도의 결과였다. 해방 후 서울역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나 2000년대까지 이용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결국 바로 옆에 신축 건물을 세우고 구역사는 새로이 실내를 정비한 다음 2012년부터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 스퀘어 빌딩에서 바라 본 <문화역 서울 284>는 서양식 건축언어를 습득한 한 일본 건축가의 디자인에다 21세기 조명을 달아 100여년전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낭만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안도 다다오의 지니어스 로사이
Genius loci. 원래 로마 신화에서 수호신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후에는 황제의 집을 지을 때 수호신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땅과 지역에 고유한 정령이 새로 짓는 집을 보호해 줄 것이란 소망에서 비롯된 문화이기도 하다.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제주의 동쪽에 ‘피닉스 아일랜드’의 일부로 만든 명상의 공간도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제주의 돌, 바람에다 시멘트 블록을 섞어서 만든 지하 구조물로 평온한 지면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지하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서 빛과 소리, 어둠과 침묵의 대조를 느끼게 된다.
담 게스트하우스, 제주 명월리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글로벌 시대의 보헤미안 문화는 이제 제주의 시골에도 들어오고 있다. 올레길이 만들어지고 배낭을 매고,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게스트하우스가 한참 유행이다. 상권이 약화되고 있는 구도심뿐만 아니라 고령화로 인적이 드물어진 시골 동네에도 집을 개조한 숙박공간이 생기고 있다. 이 동네로 시집온 한 며느리가 수백 년 된 팽나무 아래 돌담집을 개조하여 게스트하우스와 식당을 마련했다. 리모델링한 건물 내외부도 아름답지만 식당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은 집밥처럼 정성이 가득하다. 삼계탕과 갈비찜은 단연 최고. 하지만 예약은 필수.
비앤비 판 게스트하우스
영어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는 고급 별장식 손님용 집에서부터 주인이 사는 안채 옆에 붙어있는 바깥채에 있는 숙식시설까지 다양하게 일컫는다. 이 용어가 아시아 지역으로 수입되면서 개인 주택이나 빌딩을 개조한 숙박시설을 지칭하고 있다. 서울생활에 지친 주인은 제주에 내려와 2012년 ‘B&B 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제주 구도심의 오래된 가옥을 개조한 이곳은 bed &breakfast를 지향하면서도 호스텔의 자유분방함을 가미했다. 젊은 보헤미안 문화의 주축답게 판의 페이스북에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손님들의 인사가 가득하다.
호스텔코리아제주
글로벌 시대의 보헤미안은 여행문화를 이끈다. 뉴욕, 파리, 런던, 서울, 토쿄 등 전 세계의 도시가 이들의 기착지이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다. 배낭을 매고 공항에 도착한 후 사전에 예약한 곳으로 잠을 자러 가는데 이들을 위한 호스텔, 게스트하우스가 한참 유행이다. 한때 국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별장같은 펜션바람이 불다가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불리는 숙박공간이 증가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제주 구도심에 들어선 호스텔코리아제주 1호점이다. 기존 건물을 구입하여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친 후 보헤미안 문화에 걸맞게 특이한 외관그림을 더했다. 상권이 약화되고 있는 구도심에 들어서는 새로운 숙박공간 덕분에 아침과 저녁마다 사람 사는 동네 냄새가 난다.
나리타 공항
공항은 현대인의 여행과 이동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며, 중간 기착지이다. 제트기가 상용화된 1970년대를 거치면서 공항은 국가 간의 이동을 보다 빠르고 만들면서 현대문명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여러 국제공항의 설립역사가 보여주듯이 국가 정체성의 구현장소이자, 충분한 부와 지식, 여유시간을 확보한 “키네틱 엘리트(kinetic elite)"들이 현대 유목민으로서 통과하는 곳이기도 하며, 고향을 두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외국으로 직장을 찾아 나가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거치는 곳이며,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동안 쇼핑, 관광, 오락,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다목적복합공간이다. 인천공항처럼 아시아 여러 지역과 미주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기착지인 일본 나리타 공항에 석양이 깃든다.
뉴욕 버스광고의 낙서
뉴욕, 파리, 런던이 유명한 관광지인 이유는? 볼거리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도시를 개성있게 만드는 보헤미안들이 많은 도시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다. 뉴욕의 한 버스에 “다음은? 당신을 보호하는 일.”문구와 함께 1150개의 CCTV가 설치될 것이니 미소를 지으라는 소식을 전하는 버스회사의 광고가 붙여있다. 그러자 여기에 “당신이 다른 이의 여자” “또는 남자와 같이 있다면”이라는 사족이 달리고, 심지어 CCTV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런 걸 스파이질이라고 부르죠!”라고 크게 쓴 낙서도 있다. 표현의 자유, 의견의 다양성. 뉴요커가 누리는 자유이자 보헤미안으로 넘치는 도시의 거침없는 모습이다.
당나라의 불상
문화는 계속 교류될 수밖에 없지만 교류 과정에서 갈등과 화해의 과정은 필수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수입되자 중국은 외국문화라고 타박을 하면서도 불교의 설득력에 감화되기도 했다. 사진속의 불상은 당나라에서 나무로 제작된 좌불로 온화한 미소가 매력적이다. 그런데 정작 석가모니가 죽은 후 인도에서 그의 제자들은 불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성상문명이 들어오고 일반인을 감화시키려면 역시 사람과 닮은 이미지가 제격이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부처의 모습이 탄생했다. 그 불상이 동으로, 동으로 전달되어 7세기 중국, 한국에 유사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이디오피아의 성경책
문화는 경계가 없다. 아프리카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에 가까운 이디오피아는 오래 전부터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지중해 지역의 문명과 교류가 많았다. 사진 속의 성경책은 그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성경책과 달리 자세히 보면 아랍권 건축물이 보이고 예수의 모습도 수도자처럼 정적이다. 4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신학자들이 이디오피아의 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문명의 수혜자가 되었다. 기독교가 토착화되면서 수도원을 비롯한 종교문화가 발전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세계의 모든 도자기
박물관 전시장에 도자기 여러 점이 놓여있다. 모두 18세기의 것으로 화려한 장식, 다양한 형태가 얼핏 보기에 유럽의 어느 왕가에서 사용했을 것같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어느 도자기도 한 지역의 문화적 산물이 아니다. 모두 아시아와 유럽의 장인의 손결과 관심이 섞여있다. 왼쪽에 있는 주전자는 일본의 도자기에서 차용한 적, 청, 금색의 패턴을 활용하여 네델란드의 장인이 만든 것이고, 그 위에 걸린 접시는 청나라 시대 접시로 가운데에 꽃병이 그려져 있는데 이 꽃병과 접시 주변의 장식은 중국의 ‘평화와 행운’을 기원하는 것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 오른쪽 상단은 일본의 도자기로 유럽 수출용으로 제작된 것이며, 바닥에 놓인 것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작된 것이다. 문화는 이렇게 연못에 고여 있지 않고 시간을 따라 흐르고 지구를 따라 돈다.
중국과 한국의 청자 다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청자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다완의 모양도 중국에서 기본 형태를 잡고 나왔다. 그런데도 고려청자는 세계최고로 평가된다. 왜 그럴까? 사진 속의 다완 2점은 중국과 한국의 청자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양쪽 모두 넝쿨이 다완 안쪽에 문양처럼 배열되면서 그 중간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모두 틀에 넣어 문양을 찍어내는 기법을 썼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11세기 중국 북송시대의 청자는 올리브 장아찌 색을 띄고 있고 12세기 고려청자는 비취색이 영롱하다. 그러니까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다완 형식과 문양, 제작기법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결과물은 세계최고라는 것. 오늘날 세계를 점령한 한국의 스마트폰은 우연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문화에서 빌려온 기술로 완성품의 수준을 높이는 한국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하겠다.
뉴욕의 거리, LOOK!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뉴요커의 ‘제이 워킹’은 악명이 높다. 뉴요커는 한국 사람보다도 성질이 급해 빨간 신호등인데도 차가 멀리 떨어져서 오고 있으면 그냥 건넌다. 파란불을 보고 달리던 차도 그렇게 걸어가는 보행자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멈춘다. 가히 보행자 중심의 문화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이는 보행자가 많아졌다. 2010년에만 9000명의 보행자가 다치고 41명이 숨졌다. 뉴욕교통국이 대대적인 캠페인에 들어갔는데 바로 뉴욕의 번화가 주요 사고지점 110개의 횡단보도에 Look!이라는 경고문을 반영구적으로 설치하여 경각심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냥 바닥을 ‘보라’는 뜻이 아니라 ‘차를 잘 보라’는 뜻이다.
뉴욕 백화점 쇼 윈도우
백화점의 마케팅은 쇼 윈도우에서 시작된다. 멋없이 브랜드 로고와 광고모델사진만 있는 지루한 외관이 아니라 깔끔한 유리창 안에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질 때 이목을 끈다. 사진 속은 뉴욕의 5 애브뉴에 위치한 한 고급백화점 쇼 윈도우. 동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는 두 여자가 서로 의심쩍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화려한 빨강을 배경으로 서있는 원색 드레스의 두 여성, 사슴머리를 한 남자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쇼윈도우를 책임지는 직업을 윈도우 드레서라고 부른다. 성공적인 윈도우 드레서를 위해 전문가가 말하는 조언. 1. 이야기를 담아라. 2. 눈을 즐겁게 할 시각적 장치를 써라. 3. 고객을 놀라게 만들라. 4. 대담한 색, 형태를 사용하라. 5.조명에 신경 써라 등등.
뉴욕 지하철, 지속가능한 행복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뉴욕 지하철도 서울의 지하철처럼 광고가 넘쳐난다. <지속가능한 행복>은 “실천철학학교”에서 내건 광고이다. 혹시 서울에도 필요한 광고인지 읽어보고 싶은 분을 위해 내용을 번역한다. “직장은 왔다가 간다. 신체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시장도 떴다가 진다. 가까운 관계에도 끝이 찾아온다. 그러나 철학의 혜택은 평생 간다. <철학이 유용해>라는 이 강좌는 자유와 지속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오래된 원리를 제공한다. 지혜가 어떻게 현실적인 만족에 이르는지 보여주며, 삶을 보다 의식적으로 사는 방법,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주의력을 모으는 법을 가르쳐준다. 총 10회, 매회 3시간 강의에 90달러임....”
뉴욕 지하철
다른 대도시처럼 뉴욕도 지하철과 버스같은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100년이 넘은 뉴욕지하철은 계단, 역사자체가 가히 서울에 비할 수 없이 낡고 지저분하다. 더구나 서울의 지하철보다 폭이 좁아서 일단 타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어서 조심스러운데 설상가상으로 좁은 칸에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은 뉴욕만이 가진 문화와 거친 도시의 모습 때문이다. 새해가 되자 차이나타운에서 <복>이라고 크게 금색으로 장식된 빨간 중국식 달력을 구입한 중국계 노부부 옆에 아이폰에 푹 빠진 아랍계 남성이 앉아 저마다의 행선지로 가고 있다.
뉴욕, MoMA, The Clock 스크리닝
세계 제1의 현대미술관답게 모마의 프로그램은 전시부터 영화상영까지 다양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줄은 스위스 작가 크리스티앙 마클레이의 <시계 The Clock>이라는 비디오 작업을 보려고 기다리는 관객들이다. 이 작품은 그가 2010년 내놓은 24시간짜리 비디오이다. 영화, TV 드라마와 같은 영상속에서 시간과 관련된 장면을 뽑아서 편집한 작업으로 모마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비디오 작업의 길이만큼 그대로 24시간동안 상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새벽 3시에 모마에 가면 3시 근처의 작업을, 오후 6시가 가면 6시 근처의 영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작업으로 마클레이는 전세계 언론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상을 받은 바 있다.
뉴욕, MoMA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영화관이나 공연장이 아니다. 바로 뉴욕이 자랑하는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의 로비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과 뉴요커들이 티켓을 사려고 기다리고 있다. 세잔느부터 현대예술가, 미즈 반 데어 로헤부터 안도 다다오까지 미술, 디자인, 건축, 사진 등 20세기 주요 예술가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자 뉴욕의 주요 문화관광지이다. 연간 2백5십만 정도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곳으로 가히 ‘자석’처럼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컨텐츠가 도시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는 교훈을 준다.
뉴욕의 마케팅-오래된 커피가게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최첨단 브랜드만 뉴욕에 있는 것은 아니다. 동네 구석구석 100년도 넘은 가게들이 숨어있다. 사진 속의 원두커피 가게는 1907년부터 뉴욕에서 원두커피를 수입해서 판매해 온 포르토 리코 (Porto 꺄채) 상사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소매점이다. 일찍이 유기농, 친환경 커피를 수입하면서 뉴요커의 인정을 받아 여러 개의 소매점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자루에 커피원두를 담아 오래된 가구와 인테리어로 옛날 풍경을 연출하면서 맛과 멋을 아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뉴욕의 마케팅-데시구엘(Desiguel)스토어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창업한 데시구엘은 중저가 패션 브랜드이다. 30년 가까이 조용히 성장한 이 브랜드는 72여개 국에 진출해 있는데 뉴욕에도 여러 개의 스토어를 가지고 있다. 데시구엘은 스페인 어오 “똑같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남들과 차별화를 꾀하는 젊은 층을 타겟으로 강렬한 색과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어온 브랜드답게 뉴욕 메이시 백화점 인근에 위치한 스토어 외관도 예사롭지 않다. 낮에는 화려한 벽화를 자랑하고 밤에는 창문에 설치한 빛 설치가 주변에 브랜드의 존재감을 알린다.
스톤 반즈 센터 (Stone Barns Center for Food &Agriculture) 블루 힐
친환경, 유기농을 강조하는 뉴욕주 북북의 스톤 반즈 센터에는 돌로 지은 근사한 건물들이 있고 그 안에는 교육장, 카페, 샵 등 여러 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블루 힐(Blue Hill)'이라는 식당은 이 센터와 인근 타 농장에서 기른 질 좋은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곳으로 고가의 메뉴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있어서 미리 1년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이다. 이곳까지 못 오는 뉴요커를 위해서 맨해튼에도 ’블루 힐‘을 운영하고 있다. 농장에 들린 방문객은 그 대신에 ’블루 힐 카페‘에서 예약 없이 같은 재료로 만든 저렴한 스프, 샌드위치 등을 사서 먹을 수 있다.
스톤 반즈 센터 (Stone Barns Center for Food &Agricultur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뉴욕의 부자들이 사는 법. 부를 사회에 돌려만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유명한 록펠러가는 20세기 초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간 포칸티코에 낙농업을 주로 하는 농장을 만들었고 이후 6 에이커에 달하는 농지에 유기농 농업과 농산물을 생산하는 센터로 발전시켰으며 ‘신토불이’를 모토로 이 지역에 고유한 작물 등을 재배하면서 지속가능한 환경을 전파하고 있다. 예를 들어 퇴비를 사용하고 6년 순환주기로 농토를 활용하며, 가축을 방목해서 기르는 것이다. 2004년 비영리 단체로 등록한 후 일반에게도 개방되고 있는데 청소년을 대상으로 친환경 농업에 대한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멀리 방목된 닭 무리가 보인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사의 상업공간
뉴욕 그랜드 센트럴은 기차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에는 오래된 ‘오이스터 바’가 여전히 기차를 기다리는 고객을 맞고 있고 이외에도 최근에 새로이 들어선 식당이 맛있는 냄새로 유혹한다. 곡선이 강조된 실내는 오래전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진 시대의 화려함을 연상시킨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적절히 섞인 그랜드 센트럴과 인접한 건물에는 하야트 호텔 등 초현대식 상업, 비즈니스 시설이 들어서 있다. 100년의 역사를 한꺼번에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데 이것이 바로 뉴욕의 매력이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사 1
뉴욕의 발전과 함께 20세기 초 지어진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뉴요커들은 편하게 ‘그랜드 센트럴’이라고 부른다. 1년에 2천만 명이 넘는 유동인구와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곳은 뉴욕의 북쪽을 이어주는 기차역이자 뉴욕의 주요한 지하철과 연결된 교통의 중심지이다. 역사로 들어서면 웅장한 크기의 천정과 창문이 압도적인데 곡선과 우아함을 강조하는 보자르(Beaux-Arts)양식을 보여준다. 역사를 존중하는 뉴욕은 맨해튼 42가 중심지를 재개발하지 않고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가서 1998년 100여년 전의 화려함을 재현해 냈다. 천정은 천체의 지도를 펴놓은 듯 별자리가 펼쳐져있는데 중세의 책에서 이미지를 옮기느라 실제와 달리 뒤집어진 배열이라고 한다. 역사 중앙에는 오팔이 들어간 시계탑이 있는데 감정가 100억을 넘는다.
볼티모어 파워플랜트 (Power Plant)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도시 재개발의 성공적인 사례인 볼티모어 이너 하버에 들어선 여러 시설 중에서 파워 플랜트는 말 그대로 전에 발전소였던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지금은 이너 하버에 오는 많은 관광객, 시민들을 위한 쇼핑, 식음시설들이 들어서 있는데 미국 최고의 서점 반즈 앤 노블, 록큰롤 매니아들이 찾는 하드 락 카페 등이 주요 테넌트로 들어와 있다. 발전소의 위용 넘치는 외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한 간판, 안내판 등이 어우러져 볼티모어의 새로운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볼티모어 이너 하버(Inner Harbor)
도시의 고령화. 인간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도 늙어간다. 늙은 도시는 흉물스런 건물과 인적이 없는 거리로 변해가고 인근의 부동산 가치도 같이 떨어진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먼저 격은 미국 볼티모어의 경우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1950년대 도시 고령화와 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사그라져가던 이 도시의 Inner Harbor 지역은 정치인, 행정가, 기업인이 힙을 합쳐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점차 재개발에 착수하는데 그 결과 1980년대가 되면 호텔, 박물관, 쇼핑센터, 무역회관 등이 들어선 매력적인 동네로 변모한다. 1984년 미국건축가협회로부터 “미국역사상 최고의 대형 도시 디자인 개발사례”라고 평가받으면서 지금까지 여러 도시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 있다. 사진은 이너 하버 전경.
현대미술 전시-전통과 현대
현대미술 전시는 시간과 공간의 선택에 있어서 제한을 넘는다. 전라남도 강진은 청자도요지로 유명한 곳으로 강진청자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청자 유물이 전시되는 공간으로 고려의 향기와 전통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끔씩 현대 회화 작업과 입체작업이 전통 청자와 나란히 전시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특별전 형식으로 열리는 이런 전시는 어딘지 낯설지만, 달리 생각하면 안되리라는 법도 없다. 상식을 넘는 제스춰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자질이다.
현대미술 전시-여행과 쇼핑
현대미술은 대중문화, 소비문화 속을 파고 들어와 누가 창작자인지 누가 소비자인지 모를 정도로 구분을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사진 속의 모습은 2012년 1월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여의도 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라는 전시의 한 부분이다. 큐레이터는 ‘여행’이라는 주제를 던지고, 전시에 출품한 작가들과 일반인은 외국을 다니면서 쇼핑한 물건을 전시했는데 이 사진 속의 출품 작가는 직접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쇼핑한 가방과 쇼핑백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의 쇼핑벽을 훔쳐보는 듯하지만 SNS에 자신이 먹은 음식까지 다 공개하는 오늘날, 이제 ‘나는 어디서 무엇을 했다’도 전시의 좋은 내용이 되는 시대이다.
지하도 병원 광고
대한민국 성형지존. 광고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정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뉜다. 그래서 창의적이기도 해야 하지만 설득력도 있어야 한다. 강남의 한 지하철로 가는 지하도에 들어선 성형외과의 광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보통 before &after로 고치기 전과 고친 후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착한 가격을 강조하는 성형외과 광고가 많은데 이 광고는 그 모든 이미지와 숫자 대신에 8자로 된 ‘대한민국 최고의 성형외과’라는 메시지를 내건다. 그런데도 이 광고가 왠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서예체로 된 글자가 주는 안정감 때문이리라.
지하철 치킨 광고
서울은 광고로 넘쳐난다. 어디를 가든 광고가 없는 곳이 없다. 서울의 지하철역은 어느 곳이든 하루에도 수만에서 수십만이 오고가는 유동인구로 인해 광고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스크린 위의 광고는 이제 광고라기보다는 매일 어디론가 이동해야 하는 현대인의 시각적 행복을 책임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달콤한 소스로 치장한 치킨이 번들거리면서 사람을 유혹한다. 그런데 원래 손바닥보다 작은 조각이 지나가는 여성의 몸만큼이나 크게 확대되어 왠지 맛있는 먹거리처럼 보이지 않고 경배해야 할 성물처럼 보인다. 큰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제주 예술인마을 규당 조종숙의 집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글이 넉넉한 돌 위에 새겨져 있다. 대문은 있는 듯 없는 듯 정주목만 서있고 멀리 호젓한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먹향기 나눔터>라는 한글 이름을 단 규당 조종숙의 작업실이자 예술가의 집이다. 제주도 예술인마을에 위치한 여러 예술가들의 집중에서도 안이 잘 들여다보이게 지어서 시간이 있으면 들어가서 주인을 찾고 싶은 집이다. 1960년대 서예를 시작하여, 국전,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에서 두각을 보이며 한글 궁체의 대표적인 여성 서예가로 인정받는 조종숙 선생이 오랜 서예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지은 곳이다. 제주 예술인마을에는 그의 작품을 소장한 <규당미술관>이 2012년 개관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시립미술관, 도립미술관은 자주 보여도 군립미술관은 드문 편이다. 그만큼 인구가 적은 곳에 미술관을 유치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구대비 예술가 수가 많다는 경기도 양평에 2011년 양평군립미술관이 들어섰다. 밖에서 보면 조용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지역예술가, 타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학생들도 붐빈다. 주말에 미술관도 보고 인근 맛집에 들러 미각을 충족하기에 좋은 곳이다. 양평은 이외에도 문화예술 관련 사업이 계속 추진되고 있다. 양평 남한강연수원 일대에 <남한강 예술특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2012년부터 진행되고 있으나 지속적인 예산확보가 관건이다.
녹우당의 종손
해남 윤씨 집안은 해남지역의 명문가이자 상류층이었다. 자손들은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했으며 정치에서 밀려나면 돌아와 녹우당에서 회한을 풀곤 했다. 아파트 생활과 화려한 도시의 삶을 동경하는 오늘날도 윤씨 종손이 녹우당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라고 배운 가통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있다. 현재 지키고 있는 종손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도시 생활을 맛보았음에도 고향에 돌아와 주어진 책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녹우당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운이 좋으면 종손과 담소를 나눌 수도 있는데 고즈넉한 정원을 보며 기품있는 종손과 대화를 하다보면 수백 년 전 과거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사랑채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까이 있는 듯. 아! 인간 세상 더러운 때가 얼마나 내 눈을 가렸던고.”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에서 봄을 맞는 해탈한 어부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17세기 뛰어난 문인이자 복잡한 정치환경 속에서 서인의 공격에 유배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은 윤선도의 4대 조부에 의해 시작되었고 효종이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와 보강되었다.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초상화로 유명한 윤두서도 낙향하여 이곳에서 거주한 바 있다. 녹우당은 인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비가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산토리니 서울, 홍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홍대인근 허름한 옛 건물 지하에 목욕탕이 있었다. 지하 2층이자 낡은 목욕탕은 인기가 없었고 이 자리에 새롭게 복합문화공간 <산토리니 서울>이 들어선 것은 2010년. 갤러리, 카페 등과 함께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관객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작품들이 소개된 ‘트릭아이미술관’이다. 스포츠음료를 든 손이 바닥에서 튀어나오는가 하면 그림 속 주인공들이 그림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닐 것만 같은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인간의 눈은 보는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지하 2층에서 마치 유럽과 아시아 문화 속을 산책하듯이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신세계 옥상
천재시인 이상은 <날개>에서 미쯔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날고 싶은 욕망을 사르는 주인공을 묘사한 바 있다. 1929년 경성에 들어선 미쯔코시 백화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며 해방이전 장안의 세련된 서울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해방 후 미쯔코시 백화점 건물은 이리저리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60년대 현재의 신세계에 인수되면서 이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이 되었다. 오늘날 이 건물 옥상은 날고 싶던 이상의 주인공대신에 현대미술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자 파티 등 이벤트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옥상에 설치된 저명한 미국작가 제프 쿤스의 <신성한 마음>이다. 현재 국제미술시장에서 스타급 작가의 작품으로 세계 주요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치킨배달 오토바이
“치킨 왔습니다.” 배달부의 목소리는 항상 반갑기 그지없다. 그 배달하는 아저씨도 일상에서 반복적인 것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는다. <포츈 치킨>아저씨의 배달가방은 그냥 철가방이나 보온 가방이 아니라 뭔가 색다른 가방이다. 이왕이면 거리의 손님들 눈에 띄게 알록달록 조화와 그림으로 장식된 것이다. 배달부도 마치 예술가처럼 배달가방을 만드는 세상이다. 치킨뿐만 아니라 삶의 의욕까지 배달하는 것 같아 더 반갑다.
제주도 황금륭 빅버거
금강산도 식후경. 여행과 음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되고, 음식이 맛이 없으며 뭔가 부족하다. 제주도에 2003년 문을 연 황금륭 버거집은 주택이 거의 없는 휑한 중산간 지역에 있지만 하루종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이곳에는 판매되는 빅버거 때문인데 빅버거는 웰빙의 섬 제주에서 판매되는 버거답게 제주도산 돼지고기, 야채, 과일과 우리밀로 만든 야채버거이다. 주인이 직접 텃밭에서 재배한 허브를 이용하여 1인용이 아니라 2-3인용으로 만든 초특대형 버거로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최근 2호점이 생기기도 했다. 이 초대형 버거를 먹고 감동한 사람들이 허름한 식당 테이블과 기둥에 남긴 흔적 때문에 빅버거를 두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창의력이 만나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경기도 미술관 내일 도서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컨테이너는 제작하기 쉬운데다가 응용하기도 쉬워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최근 주목받는 작가 배영환은 2009년 컨테이너로 도서관을 만들고 ‘내일 도서관’이라 명명했다.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문화소외지역에 도서관을 보내는 프로젝트인데 이동하기도 쉽고, 접근성도 좋아서 수원, 시흥, 남양주, 양평, 광주에서 선보인 바 있다. 동네주민들이 오는 사랑방, 놀이터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외벽은 유리로 만들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후 경기도미술관 앞마당에도 설치되었는데 미술관 앞이라 그런지 바깥에서 보는 사람만 많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문화와 종교 그리고 사는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모여진 아이들의 이야기들이지만 언제나 발견되는 모습은 순수함이다.” 뉴욕에 사는 한국작가 강익중이 어린이들과 작업하면서 든 생각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린이와의 협업을 좋아하는 작가 강익중은 종종 한국에서 이런 순수함을 예술로 담아내곤 한다.
<5만의 창, 미래의 벽>은 강익중이 전국에 있는 5만 명의 어린이에게 가로세로 각각 3인치의 작은 나무패널에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모은 후 경기도 미술관 실내 벽에 설치한 작업이다. 2008년 5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자신의 꿈을 말하는 동심의 세계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패널 하나하나 설치하기 위해 대학생, 군인, 장애인, 보호감찰 대상자들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수고한 벽화 작업이다.
테마파크의 섬 제주, 항공우주박물관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2008년까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서귀포시 안덕면 일원에 신화역사공원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최근 유치한 박물관이 새로이 건립되고 있는 항공우주박물관이다. 이곳은 공군에서 사용연한이 지난 전투기, 헬기와 함께 우주산업, 항공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곳으로 계획된 곳이다. 테마파크의 섬 제주에 컨텐트가 뛰어난 거대한 박물관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은 좋은 소식이며 오설록차박물관 바로 옆이자 영어교육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지리적 장점을 어떻게 이용해서 성공적인 문화관광을 이끌어갈지 궁금하다.
테마파크의 섬 제주, 세계자동차제주박물관
문화관광이 관광산업의 미래를 이끌 것 이라는 기대가 높다. 제주도는 그러한 관광산업의 다각화를 위해 다양한 박물관, 테마파크의 인허가를 내주고 있는데 현재 그 수가 너무 많아 반복되는 컨텐츠에 관리소홀로 향후 어떤 방향으로 발전될지 궁금하다. 2008년 문을 연 세계자동차 제주박물관은 그중 컨텐츠가 뛰어난 곳 중의 하나다. 사업가 김영락씨가 수집한 온갖 종류의 자동차를 수리, 보존처리하여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화학사업을 하며 돈을 번 그가 2002년 회사를 매각한 후 박물관 설립의 꿈을 안고 돌아다니던 중 뉴욕 자동차박물관을 보고 벤치마킹한 곳이다. 마라도가 보이는 한적한 야산에 위치한 이 박물관에 클래식 카 매니아들, 자동차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학생들로 붐빈다. 롤스로이스, 벤츠 등 한때 현대문명의 첨단을 누렸던 차들이 위풍당당하게 전시되어 고즈넉한 제주의 자연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대안공간 눈과 수원의 벽화마을 2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예술가 몇 명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변화는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안공간 눈>이 자체 전시장에 전시를 선보이고, 국내외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골목영화제, 공공미술프로젝트 등을 실행하면서 예술가와 동네 주민이 만남을 주선했고 점차 주민 스스로 창작의 주체가 되도록 유도하기 시작하자 수원행궁 인근의 마을은 그 변화 속도가 빨라졌다. 여기에다 시에서 도로개선을 지원하자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고 버려지던 동네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예술보다 더 좋은 도시 활성화 촉매제는 없다.
대안공간 눈과 수원의 벽화마을 1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수원 토박이 이윤숙씨가 남편 김정집씨와 함께 수원행궁 근처의 조그만 주택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대안공간 눈>을 만든 것은 2005년. 낡은 구식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는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고, 빈집이 늘어가는 좁은 골목은 으슥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 되고 있던 차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2년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대안공간 눈>이 주축이 되어 국내외 예술가를 초빙하여 벽화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조금씩 늘어간 벽화는 온 동네를 덮어 ‘벽화마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 벽화를 보려고 늘어나는 유동인구 덕분에 동네가 살만한 곳이 된 것은 가장 큰 수확이다.
금천아트캠프 2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금천아트캠프에 입주한 작가들이 허름한 건물과 주변 환경을 활용한 것을 보면 예술가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입주 작가 중에는 음악가가 있는데 답답한 건물보다 건물뒤쪽에 버려진 공간에 <음악가의 밭>을 만들어 이런저런 식물과 야채를 심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그 밭이고 여기에다 마치 빨래를 넌 것처럼 바람에 날리는 천 작업을 더해 자칫 황량할 수도 있는 허름한 동네를 산책하고 싶은 동네로 만들고 있다.
금천아트캠프 1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용도가 없어진 공간을 문화예술로 채워 넣는 것은 유행이 되었다. 금천구는 금천구청 인근에 위치한 군부대 부지에 있는 낡은 건물을 금천아트캠프로 단장하고 문을 열었다. 이 캠프에는 지역의 작가, 음악가, 창작동아리 등이 입주해서 작업할 수 있는 작은 사무실 같은 공간이 20여개 있다. 입주한 작가와 모임은 자신들의 작업을 할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목공예, 악기연주 등 자신들의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은 캠프 건물과 목공예 작업장.
카셀 도큐멘타, 숲속의 음악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카셀 도큐멘타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예술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여름 전시에 소개된 작업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숲속에 설치된 사운드 아트작업이다. 사진에 보이는 사람들은 나무와 나무 아래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30개 이상의 스피커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나무가 떨어지는 소리, 폭탄이 터지는 소리,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노래 소리 등이 사실적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서 그 상황을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 속에서 수없이 긴 역사의 시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현실과 과거를 오고가게 된다. 자넷 카디프와 조지 버스 밀러의 <1000 년>이라는 작업이다.
카셀 도큐멘타, 폐허를 살린 예술가들
카셀 도큐멘타는 작은 도시 카셀에 예술가의 혼을 입힌다. 그 예상치 못한 결과는 종종 사람들을 즐겁게, 때로는 불편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예상을 뒤집는 새로움이 이 전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낡은 채 방치되었던 건물이었다. 여기에 예술가들이 들어가 주거공간, 부엌, 전시장 등을 만들었다. 물론 대단한 기술을 가진 작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있는 재료로 대충 무너지지 않게 기능하도록 만들었고 이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예술가가 만든 공간은 우리에게 공간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벽에 보이는 ‘IN THE MIDDLE OF'라는 글은 로렌스 위너의 작업이다. 마치 인간의 성숙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카셀 도큐멘타, 현대미술 최고의 전시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던 독일의 조그만 도시 카셀에 5년마다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바로 <카셀 도큐멘타>를 보기 위해서다. 이 전시는 프레데리치아눔과 같은 전통적인 건물의 전시장에서, 도큐멘타 홀과 같이 현대적 전시장까지, 조그만 대안공간에서 호텔 로비나 기차역까지, 사람이 다니는 곳, 다니지 않는 곳을 가리지 않고 예술가가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면 모두 개방하여 가히 그 개방성이나 총감독의 안목을 실현하는 점에서 가히 세계최고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올해 여름 열린 도큐멘타의 도큐멘타 홀에 전시된 대형작품들로 가운데에 보이는 작품이 토마스 베일의 <비행기>이다. 고무나무를 찍은 흑백사진을 조합하여 만든 이 수제 비행기는 비행의 꿈을 실현한 인간이 점점 세련된 비행기를 추구하는 관성에 대해 그 이전의 소박한 시대를 연상시키는 작업이다.
베를린의 공사 가림막
대도시 건설 공사장이나 재건축 공사장 가림막이나 펜스에 예술작업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30여년이 넘었다. 밋밋하고 기능적인 가림막보다는 시선을 사로잡고 보기에도 매력적인 아트 펜스가 널리 퍼치고 있다. 뉴욕의 에버그린 스튜디오가 1979년 경 건설업자와 손잡고 시작한 아트 펜스는 이제 전 세계로 퍼지면서 파리, 베를린, 서울, 토쿄 등 많은 곳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의 한 공사장에서 본 가림막은 눈속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건물이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오른쪽 끝만 실제 건물이고 나머지 부분은 그 건물의 외양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공사 중인지 거의 모를 정도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양인들이 애호했던 눈속임 기법이 아트 펜스에 사용되어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은 다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노버의 거리 장사꾼
길을 가다 출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파는 거리장사 전통은 오래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선튀김을 파는 장사꾼이 있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콩수프를 파는 업이 유행했으며, 아시아의 길거리에서 흔하게 보는 국수요리도 오래 전에 길을 지나는 행인의 바쁜 시간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오늘날도 거리음식은 계속되고 있다. 소시지, 꼬치, 삶은 달걀, 와플, 프렛첼 등등 문화권에 따라 그 종목은 다양하다. 사진속의 장사꾼은 하노버의 번잡한 쇼핑가에서 소시지를 구워 빵과 같이 팔고 있는데 앞에 단 판의 뜨거운 열기가 소시지와 함께 장사꾼의 몸도 달구고 있어 길거리 장사가 힘든 일임을 드러낸다. 비와 햇빛을 피하려고 세운 파라솔, 그 앞뒤도 소시지와 빵의 광고물, 뒤쪽 보관함 표면에는 인근 지역 지도까지,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위해 만든 종합구조물은 장사를 위해 발휘된 창의력의 결과이다.
베를린 빌리 브란트 박물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독일의 현대역사에서 놀라운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3년 미혼모하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을 딛고 독일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가가 되었으며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히틀러가 집권할 때 파시즘에 맞서 싸운 사회주의자였으며, 나치가 집권을 하자 북유럽으로 가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을 취재 중에 공산주의의 만행에 회의를 품고 소련의 스탈린과의 연대가 위험하다고 경고한 인물이며, 분단된 서베를린의 시장을 역임했으며, 후에 독일 총리직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1974년 가까운 동료가 동독의 스파이로 판명되면서 총리직에서 하차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독일의 통일이 어느 정도 완성된 1992년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 그를 기리는 재단 및 박물관이 베를린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난 세기 치열하게 전개된 독일의 역사가 그의 족적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베를린 KW
베를린처럼 전쟁과 파괴, 재건 등의 역사를 거친 곳은 항상 예술이 꽃피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 같다. KW(Kust-Weke) 현대미술관은 좋은 예이다. 1990년대 초 독일이 통일되자 버려진 마가린 공장건물을 복구하고 인접건물을 재생하기 시작한 후 마침내 1999년 2000제곱미터 규모의 전시장, 작가 스튜디오를 보유한 현대미술센터로 문을 열었다. 제한된 공간 때문에 기존의 미술관처럼 컬렉션을 확보하기 보다는 실험적인 전시, 이벤트를 보여주는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뉴욕의 P.S.1처럼 비영리로 운영되면서 국고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베를린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업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96년부터 시작한 베를린 비엔날레는 이 미술관의 대표행사인데 2012년 현재 7회를 맞아 정치적 신념과 예술을 접목한 작업들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앤디 워홀의 마오
마오쩌둥에 대한 애정은 중국인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작가 앤디 워홀, 한국작가 김동유 등 예술가도 중국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마오를 그렸다.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그려진 마오는 더 이상 공포의 정치가가 아니라 매력적인 유명인사로 변모한다. 워홀은 1970년대부터 마오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회화로 제작했으며, 그가 즐겨 그리던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과 함께 당시 미국의 적국이었던 중국의 정치인을 유명인사로 만들고 있다. 사진의 장면은 베를린의 함부르그 반호프 미술관에 소장된 워홀의 작업으로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미술관의 대표작품이 되었다. 마오의 초상을 그린 그림이 통일된 베를린의 한 미술관의 상징처럼 대접받는 시대. 확실히 예술은 국가를 넘고, 시대를 넘어 오래 남는 것 같다.
리처드 아츠워거
1929년생인 아츠워거는 한때 아이들 사진을 찍으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예술가 지망생이었으며, 딸이 태어나자 가구를 만들어 팔면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 가구, 오브제를 오가면서 작업을 했고 1960년대 중반 40세 가까워서 예술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현재 건축, 조각, 설치, 회화 등 거의 모든 장르와 영역을 넘나드는 그는 미국작가중 주목할 만한 작가로 꼽힌다. <No Exit>은 그런 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등에 ‘출구’라고 쓴 단어가 반복되는 작업이다. 긴 미술관 복도를 적당한 간격으로 등이 설치되어 있으나 정작 100미터가 넘는 긴 복도의 출구는 1개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출구’와 ‘출구 없음’은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베를린 함부르그 반호프 미술관
베를린에 위치한 함부르그 반호프 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 19세기 중반 세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의 기차역을 개조하여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980년대 중반 베를린의 사업가 에릭 막스가 자신의 컬렉션을 베를린시에 기증하자 시정부는 이 공간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곳답게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요셉 보이스, 안셀름 키퍼, 시그마 폴케 등의 작가뿐만 아니라 미국의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다양한 작가들의 대형작업을 선보이며 때로 중국 등 아시아의 작가도 소개한다.
사진 속에 보이는 푸른 빛 설치는 댄 플래빈의 형광등 작업이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형광등을 활용한 설치작업으로 등장한 플래빈은 이처럼 건축적 공간에 빛을 더하여 원래의 다소 소외된 공간을 지각과 체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플래빈이 처음 형광등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자 동료작가들이 ‘난 왜 그런 것을 착안하지 못했지?’라고 질투했다고 한다. 새로운 영역 탐구는 현대미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과 파리광장
통일은 많은 것을 바꾼다. 동과 서를 나누는 적대적 공간이었던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 문은 통일이후 통일의 상징이자 관광명소로 변했다. 원래 브란덴부르그 문은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비로 18세기 말 세워진 구조물이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프러시아를 점령하면서 이 문을 통과한 바 있고, 프러시아 제국은 1814년 연합군과 함께 나폴레옹의 정권을 내쫓기 위해 파리를 점령하는데 이를 기념해서 브란덴부르그 문 앞의 광장을 파리광장이라고 명명했다. 베를린의 파리광장. 유럽의 역사는 특정한 공간에서도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다.
2012년 파리광장은 젊은이들의 공연장소가 되었다. 비보이의 춤부터 음악공연까지 다양한 퍼포먼스가 열리면서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공포와 긴장의 장소가 통일이후 원래 의도한 대로 평화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인간의 몸짓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속에서 미국과 독일의 군사 2명이 한 여성을 가운데 두고 키스하는 장면은 전쟁이 사랑으로 승화된 오늘을 보여준다.
베를린 의회 의사당의 한스 하케
독일 의회가 새로운 집을 설계하면서 예술을 포함하기로 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보여준 과정은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시작은 의회 건물 앞에 “독일 국민을 위하여”라고 새겨진 문구이다. 이 문구는 1916년 빌헬름 2세의 지시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독일작가 한스 하케는 이 문구의 구절이 현대 독일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1999년 작품설치 의뢰를 받자 <DER BEVÖLKERUNG>이라는 문구를 네온으로 건물 내부 정원에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인구” 또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시민권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이민자, 외부인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단어였기 때문에 결국 의회는 이 작품의 설치허가 여부를 투표에 부쳤고, 260대 258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다. 의회에 선출된 의원들은 자신이 지역구에서 가져온 흙을 이 정원 바닥에 뿌릴 수 있는데, 의원이 바뀔 때마다 이 흙 뿌리기는 계속된다. 예술이 감동적이면서도 제도권과 껄끄러운 관계일 때 누가 옳은가를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예이다.
베를린 의회 의사당
독일의 통일은 여러 가지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중 하나가 국민을 대표하는 통합된 의회의 자리였다. 선택된 곳은 바로 분단 전 1930년대까지 의회 건물로 쓰이던 곳. 그러나 이 건물은 1889년 고전적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공되어 사용되다가 1933년 화재,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건물이었다. 냉전시대 서독 의회는 이 건물을 보수해서 상징적으로 1년에 1번씩 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정식 의회 건물은 본에 있었다.
1995년 본격적으로 통일 독일 의회를 위한 건물보수에 들어가는데 영국의 노만 포스터가 설계를 맡았고, 독일 예술가의 작품을 건물 곳곳에 설치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 중앙 기둥 위부분에 “독일 국민을 위하여”라는 독일어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살짝 보이는 것이 유명한 유리 돔이다. 이 돔은 본회의장 위를 덮고 있으며 나선형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걸어 다니며 베를린의 도시풍경을 360도 감상할 수 있다. 미리 예약한 방문객에게 개방된다.
통일 후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은 한때 베를린을 가로지르면서 자유과 억압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나누었던 벽이다. 통일된 후 장벽의 일부는 기념물로 뜯겨나갔고 남아있는 벽 동쪽에 평화를 기리는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베를린 중심부 1.3km에 걸친 벽에는 1990년부터 전 세계에서 온 1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저마다 벽화를 그리면서 통일된 베를린을 축하하고 평화의 시대를 예찬했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훼손되자 2000년부터 복구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게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 평화 기념비이자,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갤러리가 되었다.
베를린 TV 타워
이 타워는 베를린 한가운데에 서있으며 독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유럽에서 4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1969년 완공된 이 타워는 368미터의 높이의 구조물로 낮에는 햇빛을 받아 빛나고 밤에는 조명으로 빛이 나는 베를린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원래 통일이 되기 전 동베를린의 정치인 발터 울브리트가 제안한 타워로 서베를린의 성장에 맞서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낮에 빛이 날 때 둥그런 구형에 햇빛이 반사되면서 십자가 형태의 반사광을 만드는데 사람들이 우연히 발견한 이 십자가 형태는 발터 울브리트를 기리면서 ‘성 발터’ 또는 ‘교황의 복수’라고 불린다. 우연이지만 하늘로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야망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높은 곳에 빛나는 십자가는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있다.
베를린 알테스 뮤지엄의 로툰다
최초의 박물관 건축물로 알려진 알테스뮤지엄을 설계한 칼 프리드리히 쉰켈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알테스 뮤지엄에도 그리스, 로마건축의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건물의 중앙에는 1, 2층을 모두 차지하는 로툰다가 있는데 하단에는 그리스의 코린트양식의 기둥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기둥 사이에 로마시대에 제작한 조각상들이 서 있으며, 위에도 조각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천정에는 로마의 판테온 신전의 돔과 유사하게 설계된 대형 천정이 있고, 그 천정 가운데로 열린 창이 있어서 햇빛이 들어온다. 이 뮤지엄은 남쪽 유럽에서 시작된 건축문명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역사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최초의 박물관 건축, 알테스 뮤지엄, 베를린
베를린에 가면 박물관이 모여있는 ‘박물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페라가몬 뮤지엄 등 서양문명의 뿌리를 볼 수 있는 아랍, 그리스, 이집트의 유물들이 정연히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알테스 뮤지엄은 1830년에 설립된 곳으로 ‘오래된 박물관’이란 명칭답게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건축가 칼 프리드리히 쉰켈에게 왕실컬렉션을 국민에게 선보일 수 있는 박물관 건물 설계를 의뢰했다. 유럽근대문명이 꽃피던 시기에 쉰켈이 지은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리스의 건축과 로마시대의 건축에서 모티프를 차용하여 설계되었는데 유럽에서 박물관으로 설계된 최초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오니아식의 기둥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건물정면, 전시공간의 평면적 배열은 선명한 좌우 대칭과 질서를 중시하는데, 이러한 구조는 실내에도 이어진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포천아트밸리 조각공원
포천의 폐채석장을 예술과 문화에 접목하여 재개발한 ‘포천아트밸리’는 전시장, 공연장, 조각공원, 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조각공원은 비탈진 언덕에 위치하여 강건한 바위, 그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 등, 자연의 혼란스러움, 아름다움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바위 오른쪽 끝에는 누워있는 인간의 뻗은 두 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전경에는 국적불명의 의자, 바위, 타공된 철판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있다.
예술은 자연의 동반자일까 아니면 훼방꾼일까?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 때 이런 점을 얼마나 고려할까? 미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자연과 만나는 예술은 그 기준을 보다 자연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정말 무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을까? 비와 바람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화려한 색채를 상실하게 되면 자연의 힘을 알게 되진 않을까? 포천아트밸리 조각공원에서 드는 생각이다.
포천아트밸리 호수와 무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아와지지마에 있는 폐채석장을 상업, 문화시설로 개발하여 유메부타이(꿈의 정원)를 만든 바 있다. 간사이 공항을 지을 때 이 채석장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최고급 호텔, 식물원, 정원 등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의 포천에도 폐채석장이 있었다. 이곳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화강암 채석장으로 사용되다가 용도가 다하자 버려진 곳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예술과 문화를 접목한 재개발 사업을 벌여 ‘포천아트밸리’를 조성했다. 2009년 가을 개장한 이곳은 전시장, 공연장, 조각공원, 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돌을 캐내면서 형성된 깊은 계곡에 물을 채워 만든 넉넉한 호수이다. 그리고 그 호수 옆에는 거대한 절벽을 뒤로한 야외 공연장이 있다. 푸른 물위로 감도는 엷은 안개는 아픈 과거의 기억을 지워준다. 자연을 탐하고 버리고 다시 가꾸는 갸륵한 정성은 역시 변화무쌍한 인간다운 모습이다.
추억의 공간
사진을 잘 들여다 보라. 사진 속에서 뭔가 특이한 점이 없는지. 국밥집, 사진관, 다방, 복덕방 간판이 있는 이 길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불조심, 반공이라는 거리포스터를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1970년대의 모습인데 사진 오른쪽 끝에 노랑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살짝 염색한 2012년 스타일의 여성이 보인다.
이 추억의 거리는 실제공간이 아니라, 박물관 야외에 재현된 소위 테마파크와 같은 체험공간이다. 나지막한 지붕, 기울어진 전봇대, 빛바랜 영화포스터, 빨간 공중전화기 등은 쥐를 잡아 학교에 가져가고, 반공표어 숙제를 하던 그때 그 시절을 연상시킨다. ‘추억’은 특정 시간과 공간에 연루된 개인적 기억, 감상적 향수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픈 기억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먹던 찐 고구마의 달콤한 기억도 모두 추억의 일부이며, 때론 감상적으로 때론 병적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단편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것이 자본으로 귀결되는 오늘날 ‘추억’은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수장 1908
물건이나 토지를 사고파는 일은 오래전부터 계약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계약서에는 그 거래를 증명하기 위한 장치가 개입되는데 바로 도장이다. 나무나 뼈, 점토를 깎아 근사한 글자로 새긴 도장은 중국, 수메르 등 여러 고대문명에서도 발견되며 우리나라에서도 부여시대부터 사용되어 역대 왕실, 양반계급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특히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들어서 도장은 서명방식과 함께 널리 퍼지는 데 호적 등의 문서기록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글을 잘 모르는 하위계층은 손도장을 사용했으며, 그중에서도 손가락을 대고 그리는 것을 수촌, 손바닥을 대고 손의 전체 모양을 따라 그리는 것은 수장이라고 불렀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민속박물관에 소장된 1908년 매매계약서로 서류 왼쪽에 기입한 수장이 선명하다. 왼손을 대고 그려 매매의사를 확인하고 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1914년부터 인감제도를 도입했다. 사실 일본은 1871년부터 자국에서 인감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까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굴절된 역사를 뒤로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경부터 인감증명을 폐지하고 신분증, 전자위임장 등으로 대체한다고 하니 계약의사 표현방법이 100년이 지나면서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꼭두
이승을 떠나는 사람의 상여에 얹어 장식하는 형상을 꼭두 또는 목우라고 한다. 나무를 깎아 20-30센티 높이의 사람모양, 동물모양, 식물모양의 형상을 만든 것으로 투박하게 제작되었지만 화려한 오방색 색채를 입고 저승으로 가는 이의 동행자처럼 상여의 위에 놓여 있곤 했다. 말하자면 서민공예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꼭두는 정중하게 예를 취하는 자세, 위협적인 자세,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을 등장하며, 아마도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수호정령과 같은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이한 것은 지배층의 상여에는 인물 꼭두가 적다는 점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꼭두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 일제 강점기에 만든 것들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며, 충청도의 것은 평평한 나무를 쓰는 것이 특징이고, 경상도의 것은 불교조각의 냄새가 나는 것이 다르다.
봉은사 4월 초파일
석가모니의 탄생일, 절 마당에는 연등이 걸린다. 연꽃모양의 등을 걸고 밤에는 불을 밝혀 복을 비는 연등회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행사이다. 조선시대에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알고 인간의 마음을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가 되었고 최근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강남 봉은사 마당에 연등이 가득 차 있다. 연분홍 꽃모양의 등이 머리위로 즐비한데 저절로 부처의 마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같다. 연등을 만들고 거는 모든 과정이 특별한 기적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일이 마음의 어둠을 가시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갖는 것을 보면 신성한 존재를 인정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는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개념있는 가게 141 프로젝트
숙명여대 인근에 1.3평 크기의 작은 가게가 있다. 141 Project. 커피, 차 등 음료를 파는 데 너무 작은 가게여서 테이크-아웃만 할 수 있는 가게다. 가게는 작지만 이 가게 주인은 넓은 세상을 생각하는 개념있는 젊은이다.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한 한재우씨는 군대를 다녀오고 난 후 신발 한 켤레를 파면 한 켤레를 기부하는 ‘탐스 신발’처럼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게를 꿈꾸게 된다. 바로 공정무역 커피인 Peace 커피를 한 잔 팔 때마다 커피원두의 원가를 유니세프에 기증하는 가게를 연 것이다. 물론 공정무역 코코아와 홍차, 설탕도 사용한다. 그래서 노란 색 간판의 가게 앞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슬로건이 작게 쓰여 있다. “쇼핑은 정치다.”
개념있는 가게
공정무역이 쇼핑객들을 부르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지역의 수출업체가 환경보전 기준을 지키면서 생산한 제품을 정당한 가격으로 구매하자는 사회운동이 쇼핑과 만나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90년대 특히 붐을 일으켰고, 이제 한국에도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보통 커피, 차, 꿀 등 먹는 제품이 주를 이루지만 수공예품, 옷 등도 상품대에 오르고 있다.
안국동 골목길 상권에 있는 작은 공정무역 가게의 모습이다. 작은 정원 뒤로 옷, 가방 등 수공예품을 진열한 모습이 보인다. ‘정의 사회’는 작은 쇼핑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더 나가 교회, 학교, 대학 등 단체가 공정무역에 참여하면 그 파급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경기창작센터 오픈 스튜디오 2
경기창작센터 인근 마을은 땅을 팔겠다는 사람, 땅을 소개하겠다는 중개사의 광고로 넘친다. 조용한 시골에 부동산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오픈 스튜디오가 열리는 동안 한 부동산 사무실 공간에서 2명의 여성 작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1970년대의 복고풍 원피스를 입고,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미리 다른 사람이 녹음한 노래를 스피커로 틀어놓고 그에 맞추어 무표정하게 서서 기타를 치는 흉내를 내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 순박한 시골처녀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말에 이끌려 결말을 알 수 없는 모르는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부동산 광풍이 부는 이 동네의 모습처럼 보인다. 녹음한 노래의 예쁜 목소리 주인공은 경기창작센터의 한 여성 큐레이터였다고 한다.
경기창작센터 오픈 스튜디오 1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경기도립직업학교가 있었는데 수리한 후 2009년 경기창작센터로 개관했다. 넓은 창고, 교실을 개조해서 30-40명 정도의 예술가가 입주하여 작업실을 쓰고 있다. 국내외 작가가 3개월에서 1년에 걸쳐 작업실에서 자기 작업을 하면서 공무원, 학생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1년에 한번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거나 작품을 제작하여 선보이는 <오픈 스튜디오>가 진행되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은 2010년 8월 오픈 스튜디오 행사의 일부이다.
창작센터 인근의 길에 흔히 볼 수 있는 이 건물은 지어만 놓고 땅을 판매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한 작가는 이 빈 건물 안에 흙을 한 트럭 쌓아놓고 원래 자연이었던 땅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다. 무덤처럼 단순하게 쌓인 흙더미가 가건물과 대조되면서 땅을 팔려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권리가 교차되는 것 같다.
충정각 외부전경
고층건물이 즐비한 충정로 대로변 이면도로에 일제 강점기에 지은 고즈넉한 서양식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충정각이다. 벽에 붙은 담쟁이와 붉은 벽돌, 뾰족한 탑, 돌출된 창이 영국의 아츠 앤 크래프츠 양식의 시골저택을 연상시킨다. 실내공간을 넓게 보이게 하는 돌출된 창문양식은 1870년대 서구의 주택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그 양식을 배운 외국인 건축가가 한국에 이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이탈리아 식당 겸 대안예술공간으로 개방되어 음식을 먹으면서 재능있는 예술가의 전시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역사가 흐르면서 서울의 이름이 한양, 경성, 다시 서울로 변해 왔는데 서울의 모습은 그 변천의 흔적을 조금씩 담고 있다. 최근에 14세기 구축된 한양도성의 유적을 이어서 복원할 계획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 개발위주였던 서울이 문화유산보존으로 방향을 돌리는 징후처럼 보인다. 유럽에 갈 때마다 문화역사를 담은 도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도시개발을 추진한 덕에 문화관광지로 자리잡은 곳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오랜 역사의 흔적이 많이 파괴된 서울이 갑자기 유럽의 도시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충정각처럼 서울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짧은 역사의 흔적이라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2010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전시된 자전거
자전거는 에너지가 들지 않는 유용한 교통수단이자 거의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쉬운 도구다. 페루출신의 작가 자코모 카스타눌라는 주로 가구, 교통수단 등 인체에 관련된 물건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데 2010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된 여러 곳을 쉽게 다닐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 <Slow Trans>를 특별히 제작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앞에 아이를 2명 태울 수 있는 자전거, 접이용 자전거, 다리를 풀면 길거리의 상품가판대처럼 쓸 수 있는 물건들이다. 개개인의 용도에 따라 창의력을 발휘하여 만든 이런 물건들은 공장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대량생산의 획일적 제도에 도전하고 있다.
2010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1
문화와 예술을 통한 도시개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는 이 슬로건을 내걸고 2005년부터 안양유원지를 중심으로 안양시 전역에서 2-3년에 한번씩 진행되어 온 사업이다. 처음에는 주로 안양유원지 인근에 예술가가 만든 조각, 설치를 배치한 예술공원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지금도 이 공원에 가면 영구설치된 작품들을 보며 산책할 수 있다.
2010년 진행된 프로젝트는 한국계 미국인인 박경 예술감독의 지휘 하에 진행되었는데 ‘동네’를 만들어 살아온 사람들처럼 결과물보다 진행과정을 강조한 작업을 선보였다. 작은 프로젝트들이 도시전역에서 진행되었고, 학운공원에는 ‘새 동네’를 만들어, 8개의 컨테이너로 만든 ‘오픈 스쿨’, ‘오픈 파빌리온’, ‘오픈 하우스’를 설립했다. 지금 사진에서 보이는 것이 독일의 라움라보어가 제작한 ‘오픈 하우스’. ‘새 동네’에는 사무실, 갤러리, 공연장, 복합공간이 들어섰고 시민, 작가, 학생, 자원봉사자 등이 어울리는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안양석수시장 프로젝트
대형마트의 깔끔한 진열대에서 쇼핑하려는 사람이 늘면서 안양의 석수시장과 같은 재래시장은 점점 사양길이다. 한때 옷집, 기름집 등 온갖 가게가 가득찼던 점포는 점점 비어가고 있고 아직도 영업을 하는 닭집 옆 가게는 비어 있다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석수시장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예술가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2005년 시장 속에서 어떤 예술이 가능할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매년 진행되면서 빈 가게에 토론과 사교를 위한 워크샵, 국내외 작가를 초대하여 작업실로 제공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상인들이 가게에 예술가가 들어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매일 좁은 동네에서 부딪히다 보니 외국인 작가와 떡, 차를 같이 먹는 사이로 변해갔다는데 대안공간 ‘스톤앤워터’ 관장은 이를 ‘문화바이러스’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안양석수시장과 미술의 만남
안양에 가면 아파트 숲 사이로 1979년 문을 연 재래시장인 석수시장이 나지막하게 버티고 있다. 낡은 건물과 비좁은 거리에 손님의 흔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지 꽤 된 이 시장에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을 내건 일군의 문화인들이 들어와 2002년 ‘스톤앤워터’ (돌과 물, 즉 석수)라는 명칭의 대안공간을 만들었고, 2005년부터 이 대안공간의 주최로 <석수시장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석수시장이 위치한 만안구에 추진되는 뉴타운 사업에 반대하는 상인들의 현수막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젊은 작가가 그린 시장상인들의 초상화가 보인다.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은 어느 주말 아침, 찌뿌둥한 하늘, 빛바랜 시장건물 외벽, 회색톤의 초상화 인물얼굴, 그리고 낡은 녹색천막과 작가의 그림 속의 녹색, 주황, 빨강, 노랑의 흔적이 소리없이 어울리며 생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가슴 짠한 감성적 사건으로 만든다.
충정각 전시장면
방문자의 관심을 끌 충정각에 갈 때마다 두 가지에 놀란다. 하나는 개발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이 금싸라기 같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건물이 지금도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국적인 건물이 오랜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쓸만한 건물로 유지되어 그 안에서 맛있는 요리와 멋있는 예술이 놀라운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와인잔과 식기류가 잘 세팅된 테이블 옆으로 최제헌 작가의 설치작업이 보인다. 독일에서 공부한 최작가는 정원, 야외, 길 등 기존의 공간을 재해석한 설치로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이미 공장에서 가공된 산업자재의 형태, 질감, 색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추상적인 설치를 선보이고 있다. 100여년전 과거 일제 강점기의 유산에다 예술을 입혀 살아있는 현대인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다.수 있는 설명 및 내용을 입력하세요.
서귀포 조형물
거리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조형물이 들어서고 있다. ‘조형물’은 건물의 장식물, 거리의 장식물로 돈을 받아 만든 예술적인 작업을 일컫는데 1988년 건축법에 따라 대형건물에 미술장식품을 설치하도록 의무규정이 나온 후 유통되기 시작한 단어이다. 이는 옥외에 건물을 장식할 목적으로 세우는 작품을 일컫는데 기존의 ‘공공조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조형물’이라는 단어가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자는 공공장소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보다 예술성을 띈 작품을 일컬으며, 후자는 ‘00축제 상징조형물’처럼 주문을 의뢰한 주체기관의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을 가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두 단어는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귀포 앞바다에 자연이 만든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주상절리가 있는데, 그 인근에 사진속의 고동 조형물이 놓여있다. 조형물의 장점은 종종 사람들이 만지고 놀더라도 크게 제어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닷가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반영한 고동은 아이들이 놀고 사진찍는 데 안성맞춤이다. 어쩌면 예술이 지나치게 ‘만지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기 때문에 조형물은 ‘만지세요’라고 친절하게 위안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시민회관 담벼락 전시
거리는 사람, 차, 동물 등 거의 모든 것이 다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열린 공간은 말 그대로 모든 것에 열려있기 때문에 강아지의 소변부터 장난스러운 낙서까지 다 허용된다. 그러나 도시의 행정을 담당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열린 공간은 골칫거리이다. 소변냄새, 낙서는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해악이며, 가로수를 심고, 화단을 만들어 보기 좋고, 냄새 좋은 길로 만들어야 좋은 도시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벽화를 통해 아름다운 도시,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를 시도하는 곳이 늘고 있다.
사진은 제주시 구도심에 위치한 제주시민회관의 담벼락이다. 행정구역으로 제주시 이도1동에 속하는 이 동네에 2007년 기존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서예와 그림을 담은 벽화거리가 들어섰다. 원래 화랑과 표구점이 많았던 동네였는데 그러한 특성을 살려서 주민자치위원회와 주민센터가 손잡고 지역작가, 주민의 작품으로 구성된 ‘병풍거리’와 ‘벽화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1964년 건립된 시민회관의 순박한 건물, 오래된 전봇대와 아스팔트 길, 현무암을 가공해서 만든 화분과 꽃 사이에 호랑이, 노송 그림, 서예작품이 똑같은 크기의 액자에 담겨 벽에 설치되어 마치 거리의 장식품처럼 덩그러니 서있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무상하게 거리의 장식물로 변한 서화작품들은 날마다 자외선에 노출되며 원래의 빛을 잃고 있다. 벽화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겠다는 행정가들의 의욕만큼이나 작아 보인다.
인천 송도
원래 백사장, 개펄로 이루어진 이 동네는 능허대라고 불리었으나 일제 강점기 풍광이 빼어난 곳을 송도(松島)로 부르기 좋아하는 일본인의 취향을 따라 명칭이 변모했다고 한다. 해방이후에는 바닷가 유원지로 명성을 날리면서 인천인근의 사람들이 놀러가던 휴양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송도신도시계획이 수립된 이후 큰 진척이 없다가 1999년 송도정보화신도시계획이 수립되고, 미국의 게일사가 2001년 송도국제업무지구조성에 참여하면서 인천시는 송도,청라, 영종도를 묶어서 ‘경제자유구역’이라는 광범위한 미래형 도시개발에 착수한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송도의 개발 속도는 늦어지고 있지만 다행히도 이전에 시도한 프로젝트들이 하나씩 완성되고 있다. 2009년 이후 송도에는 영종도에 위치한 인천국제공항과 연결된 인천대교가 준공되고,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이 열렸으며, 국제학교, 잭니클라우스골프장이 준공되어 그 사이에 하나 둘씩 입주한 아파트, 주상복합, 대학교 등과 함께 어느 정도 도시의 윤곽을 잡고 있지만 아직도 썰렁함은 면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잭니클라우스 골프장에서 바라본 송도의 모습이다. 자본과 상상력을 토대로 게가 놀던 바닷가에 골프장을 세우는 시대를 대변해 준다. 갯벌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지은 인간의 생태계는 국제학교, 골프장, 센트럴파크, 영리병원, 고급아파트, 금융허브, 연구단지와 같은 근사한 현대문명의 얼굴들로 화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화장발 뒤에는 인간의 흔적이 드문 썰렁한 도시가 있을 뿐이다. 마치 공상과학 영화 속의 도시나, 예술가의 사진 속 장면처럼, 세련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텅빈 도시의 정적을 깨는 것은 간혹 지나다니는 차뿐이다.
19세기 중반 사진이 발명된 이후 인적이 드문 텅 빈 도시 사진이 많이 등장했는데 인간의 움직임을 포착할 만큼 카메라의 셔터 스피드가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늘어가는 고층건물로 이루어진 도시가 고유한 영혼을 가진 것처럼 경이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걸어본 송도의 신도시는 경이로움을 넘어 황량하다. 이 새로운 생태계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이 생태계를 완전하게 만들 사람들은 아직 이곳을 매력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부산 해운대
최근 부산의 부동산 건립 붐은 과거 서울의 붐을 능가할 정도이다. 몇 개월마다 가보면 많은 건물이 쑥쑥 올라가고 있는데, 여의도, 마포, 강남보다 더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 견줄만한 곳은 인천 송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도는 최근 분양, 입주가 늦어지면서 과거보다 속도감이 떨어졌고 부산은 나홀로 70층이 넘는 고층건물을 주거용으로 분양하는 메가도시가 되고 있다. 해안을 따라 ‘마린시티’, ‘센텀시티’ 등이 들어선 21세기 부산은 2012년 현재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80층)을 보유한 도시가 되었다. 주상복합건물이라고 하지만 최근 고층건물은 대부분 주거용 공간이며, 이를 반영하듯이 현재 전국의 주거용 건축물(총면적 기준) 중에서 아파트가 51.7%, 단독주택 16.4%, 다가구주택 6.7%, 다세대주택 5%, 연립주택 2%을 차지한다고 한다. 가히 고층 아파트 시대이다. 최근 단독주택이 인기가 있다고 하지만 국토면적이 적은 현실을 감안할 때 아파트 인기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 같지 않다. 땅의 기운을 받아야 인간이 건강하다는 주장, 과거 마을과 같은 공동체 생활이 파괴되고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면 높은 창공을 바라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엘리베이터로 수십층을 오고가며 건물을 나서는 새로운 주거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파트 내에서 영화감상, 공연을 함께하는 도심형 공동체도 생겨나고 있다. 어떤 진화론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미래에 살아남는 인간은 똑똑한 사람도, 부자도 아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살아남는다고.
사진 왼쪽이 건설 중인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오른쪽은 현대아이파크로 한창 공사중이던 2010년 찍은 사진이다.
봉은사
삼성동 코엑스 건너편에 위치한 봉은사는 그 이름이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절이며, 조선시대를 거쳐 주요한 사찰로 자리를 잡았다. 원래 선정릉 자리에 봉은사 터가 있었으나 중종의 정릉이 현재의 선정릉 자리에 이전되면서 봉은사는 1562년경 그보다 동쪽인 지금의 위치에 이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을 겪으면서 사찰이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이후 재건되었다. 강남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동안에도 현재 자리에서 전통 불교의 전파소로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봉은사 뒤로 솟은 아이파크는 강남의 최고가 아파트중의 하나인데,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간 수직 건물과, 오랜 세월에도 널찍하게 수평으로 자리잡은 사찰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강남풍경
서울은 메가도시 답게 동서남북으로 잘 발달된 오래된 수도이다. 그중에서 강남은 지난 40여 년간 한국이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급속도로 개발된 지역이다. 1975년 강남구가 성동구에서 분리되면서 처음 생긴 후, 1979년에 강동구가, 1988년에 서초구, 송파구가 신설되었다니 오늘날 ‘강남’이라는 명칭과 의미도 결국 2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자본을 가진 계층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자리잡은 셈이다.강남을 가로질러 발달한 테헤란로는 서초동에서 삼성동에 걸쳐 뻗어 있고 고층건물이 줄지어진 강남 속 도심이다. 이 이국적 도로명은 1977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서울의 도로명칭을 교환해서 사용하자는 협의에 따라 ‘테헤란로’라는 길이 탄생했는데, 강남의 새로운 부유층에 어울리는 글로벌한 명칭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한 테헤란로 북쪽으로 조선시대 왕 성종과 왕비 정현황후, 그리고 성종의 아들인 중종이 잠든 고색창연한 선정릉이 자리잡고 있어서, 현대문명과 500여 년전 왕실묘가 공존하는 서울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멀리 선정릉의 녹음이 보이고 왼쪽으로 테헤란로의 고층건물이 보인다. 그 사이로 단독주택, 다세대주택, 나홀로 아파트 등 다양한 건물이 들쭉날쭉 들어서 있다. 지난 40여 년간 진행된 발전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저지예술인마을
제주도 산간지방인 한경면 저지리에 1999년부터 조성된 동네이다. 20여개가 넘는 작가별 창작공간과 공방, 전시장 등이 들어서 있으며, 2007년에 개관한 제주현대미술관도 자리잡고 있다.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즐기면서 현대미술, 전통문화를 아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를 만들겠다는 제주도의 후원을 받아 45원이 넘는 예산이 투여되었으나 조용한 창작촌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지예술인마을
제주도 산간지방인 한경면 저지리에 1999년부터 조성된 동네이다. 20여개가 넘는 작가별 창작공간과 공방, 전시장 등이 들어서 있으며, 2007년에 개관한 제주현대미술관도 자리잡고 있다.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즐기면서 현대미술, 전통문화를 아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를 만들겠다는 제주도의 후원을 받아 45원이 넘는 예산이 투여되었으나 조용한 창작촌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뒤스부르그 환경공원
20세기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기여했던 주요 철강공장지대였던 이곳은 탄광산업이 쇠퇴하면서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환경개발을 중요시하는 일부 시민을 중심으로 공장을 철거하기보다는 공원으로 재개발하여 역사, 문화, 예술, 레저, 자연이 어우러진 곳으로 만들어 1997년 개장했다. 물의 공원, 용광로 공원, 부스러기 공원, 철길 공원, 벙커 갤러리 등이 있으며, 친환경 시대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뒤스부르그 환경공원
20세기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기여했던 주요 철강공장지대였던 이곳은 탄광산업이 쇠퇴하면서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환경개발을 중요시하는 일부 시민을 중심으로 공장을 철거하기보다는 공원으로 재개발하여 역사, 문화, 예술, 레저, 자연이 어우러진 곳으로 만들어 1997년 개장했다. 물의 공원, 용광로 공원, 부스러기 공원, 철길 공원, 벙커 갤러리 등이 있으며, 친환경 시대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뒤스부르그 환경공원
20세기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기여했던 주요 철강공장지대였던 이곳은 탄광산업이 쇠퇴하면서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환경개발을 중요시하는 일부 시민을 중심으로 공장을 철거하기보다는 공원으로 재개발하여 역사, 문화, 예술, 레저, 자연이 어우러진 곳으로 만들어 1997년 개장했다. 물의 공원, 용광로 공원, 부스러기 공원, 철길 공원, 벙커 갤러리 등이 있으며, 친환경 시대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홍대 벽화골목
서울의 보헤미안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홍대인근에 벽화가 등장한 지 오래다. 그러나 종종 건물주인과의 마찰로 오래가지 못하고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 한적한 골목 벽에 젊은 작가들이 그린 벽화가 계속 등장하자 ‘벽화골목’이라 불리면서 점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홍대 벽화마을
서울의 보헤미안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홍대인근에 벽화가 등장한 지 오래다. 그러나 종종 건물주인과의 마찰로 오래가지 못하고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 한적한 골목 벽에 젊은 작가들이 그린 벽화가 계속 등장하자 ‘벽화골목’이라 불리면서 점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보스턴 다운타운-TD 가든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보스턴의 노스 스테이션을 끼고 위치한 보스톤 가든은 오랫동안 문화, 체육, 대중음악 공연 등 대규모 행사의 중심지였다. 1990년대 중반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면서 플리트센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5년부터 TD은행의 후원으로 TD 가든으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다운타운 개발과 함께 2천만 달러를 투여하여 새로이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보스턴 다운타운-그린웨이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로즈 케네디 그린웨이는 다운타운에 기존의 도로를 지하로 옮기고 지상에 새로이 만든 녹색공원으로 총길이가 1마일에 달한다. 그 결과 지하는 신호등이 없이 차가 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지상에는 15에이커에 달하는 공원이 만들어졌으며 2008년 공시적으로 개장되었다. 친환경적인 도심개발의 사례로 꼽힌다.
보스턴 다운타운-퀸시 마켓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1820년대에 새워진 퀸시 마켓은 다운타운의 얼굴로서 오랫동안 보스턴의 농수산물을 거래하는 지역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 농수산물시장이 더 넓은 공간을 찾아 떠나면서 기능을 전환해야했으며 이때부터 이벤트, 축제를 열면서 동시에 인근 지역의 직장인, 관광객의 점심이나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식당, 바, 쇼핑시설이 군집한 곳으로 재탄생했다.
보스턴 다운타운-현대미술관 ICA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특히 대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로서 보스턴은 워터프런트에 주목해왔다. 다운타운의 워터프런트는 고층건물과 호텔로 이미 채워져있으며, 최근 남쪽 워터프런트 개발이 한참 진행되고 있다. 호텔, 컨벤션센터, 극장, 미술관 등 새로운 시설이 속속 들어오면서 보스턴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현대미술관 ICA는 국제적인 수준의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곳으로 건축가 Diller Scofidio &Renfro가 설계했으며 2006년 정식으로 이주한 후 개관했다.
보스턴 다운타운-트리니티 교회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1733년에 세워진 트리니티 교회는 화재로 소실된 후 1870년대 현재의 카플리 스퀘어에 새롭게 로마네스크풍으로 지워진 성공회 교회이다. 타종교의 행사를 수용할 정도로 개방적이며 매년 12월에 여는 크리스마스 캐럴 음악회는 보스턴의 주요한 연례행사이다. 수백 년에 걸친 도시발전에도 불구하고 다운타운 보스톤의 주요한 문화기관으로 꿋꿋이 자리잡고 있다.
보스턴 다운타운-새롭게 변하는 건물들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현재 보스턴은 미국 북동부에서 뉴욕 다음으로 고층건물이 많은 도시이다. 바이오기술 등 첨단 산업이 성장하는 유망한 도시이자 삶의 만족도가 높은 도시이지만 물가가 비싼 것이 흠이다.
보스턴 다운타운-워터프런트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특히 대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로서 보스턴은 워터프런트에 주목해왔다. 다운타운의 워터프런트는 고층건물과 호텔로 이미 채워져 있으며, 최근 남쪽 워터프런트 개발이 한참 진행되고 있다. 호텔, 컨벤션센터, 극장, 미술관 등 새로운 시설이 속속 들어오면서 보스턴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보스턴 다운타운-워터프런트
2000년대 들어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보스턴이 달라지고 있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문화, 교육, 금융, 의료 중심지로서 인근의 지역까지 아울러 ‘Greater Boston'을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MIT 등 주요한 대학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다운타운은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자 주요 금융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최근 도심개발의 중심지이다.
특히 대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로서 보스턴은 워터프런트에 주목해왔다. 다운타운의 워터프런트는 고층건물과 호텔로 이미 채워져 있으며, 최근 남쪽 워터프런트 개발이 한참 진행되고 있다. 호텔, 컨벤션센터, 극장, 미술관 등 새로운 시설이 속속 들어오면서 보스턴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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