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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문화 이야기는 양은희 박사의 이미지 칼럼입니다. 2009년 '양은희의 시각문화 이야기'로 시작하여 2022년부터 '양은희의 도시문화 이야기'로 개편하여 매주 <델코지식정보>를 통해 소개됩니다.
1869년 런던 로얄 예술 아카데미 전시장1768년 설립된 로얄 예술 아카데미는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기관이다. 1868년 100주년을 맞아 벌링턴 하우스로 이주하였고 지금도 이곳에 위치한다. 이주한 후 웅장한 새 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언론에 내부가 소개되곤 했다. 특히 여름에 열리는 전시가 가장 유명한데 좌우로 즐비한 그림을 보러 관람객이 모여든 장면이 인상적이다. | 1869년 런던 로얄 아카데미 중앙홀1768년 설립된 로얄 예술 아카데미는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기관이다. 1868년 100주년을 맞아 벌링턴 하우스로 이주하였고 지금도 이곳에 위치한다. 이주한 후 웅장한 새 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언론에 내부가 소개되곤 했다. 벌링턴 하우스에는 회화와 조각을 따로 전시할 수 있도록 공간이 나뉘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의 조각상이 즐비한 중앙홀을 여러 관객이 둘러보고 있는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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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이집트 대표환영 리셉션19세기 대영제국은 영토를 넓히고 있었고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런던에는 화려한 건축이 들어섰다. 그중 영국 귀족 서덜랜드 공작의 저택 스태포드 하우스는 여왕의 궁전을 능가할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된 1869년 이집트 대표가 런던에 오자 공작부부가 환영 리셉션을 열어 맞이했다. 그만큼 이집트는 중요한 곳이었으며 결국 1882년 영국, 프랑스, 인도 연합군이 이집트를 점령한다. | 1869 7월 파리 패션19세기 중반 파리의 여성 패션은 과거 양식을 부활시켜 화려한 장식과 색조가 돋보였다. 허리를 강조하고 볼륨을 키우고 여러 층을 두기도 했다. 그만큼 여성이 자신을 과시할 만한 장소가 늘고 있었고 이러한 양식이 드레스 샵을 통해 인기를 끌면 신문을 통해 런던이나 뉴욕에도 곧 알려지곤 했다. 그림은 런던의 언론에 소개된 파리 여성패션 |
1859 군대환송 파티19세기 유럽 제국의 힘은 군대에서 나왔다. 크고 강력한 군대를 가질수록 식민지 개척이 용이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터는 아비규환이었다. 다친 군인을 구하고 치료하는 것도 어려웠고 사망자를 헤아리는 것도 어려워 전쟁마다 정확하게 얼마나 사망했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양쪽 군인의 시신들이 한 곳에 매장될 정도로 사상자 관리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전장으로 떠날 군인을 위한 파티는 성대했다. 그림은 마르세이유에서 출발할 군인들을 위한 환송파티. | 1859 나폴레옹 3세 승전 파티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근대화에 앞장선 군주로 오늘날 파리의 도시 구조와 5-6층의 아파트로 구성된 외양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도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켰으며 1859년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으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인근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재임중 프랑스 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확대했다. 그림은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3세를 환영하는 파티. |
영국 최초의 학교빅토리아 여왕 통치하의 영국은 근대식 교육에도 공을 들인다. 1837년 런던에 설립된 Home and Colonial School Society는 여왕의 후원을 받으며 영국 최초의 여성 교사를 두었고 인도에서 온 인도인에게 교사수련을 받게 하기도 했다. 이 학교는 어린 학생을 위한 체육관과 놀이터를 두고 신체 건강에 신경을 썼으며 학교 입구에는 ‘Holiness unto the Lord(주님께 거룩함)’이라는 문구를 크게 걸어서 기독교 신앙에 토대를 둔 곳임을 알렸다. 그림은 학교의 운동장. | 1843 루앙 파리 연결 기차 개통식프랑스 수도 파리와 그 북쪽에 있는 산업도시 루앙 사이에 기차가 개통된 것은 1843년이다. 이 노선은 프랑스 최초로 건설된 열차이기도 하다. 이후 1847년 북쪽 항구도시 르아브르까지 연장되어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주요 노선이 된다. 영국에 기차노선이 먼저 들어서자 영국과의 교역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만든 노선으로 건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사업자들이 합작으로 추진되었다. 그림은 1843년 5월 개통을 축하하는 행사 모습이다. |
체스트넛 힐-윌리엄 킹의 자택 1860미국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킹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앨라배마에 토지를 구입하고 체스트넛 힐이라는 농장을 세웠다. 앨라배마가 주로 승격하자 상원위원이 되었고 이후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평생 독신이었고 동료 상원위원이자 독신인 제임스 뷰캐넌과의 조용한 염문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농장과 저택은 1920년대 화재로 사라졌다. | 1860 권투시합-히난과 세이어19세기 영국과 미국의 대립은 스포츠로 이어지곤 했다. 1860년에는 미국 권투선수 존 히난 과 영국 권투선수 톰 세이여가 영국 햄프셔주의 한 야외 경기장에서 세계 챔피언을 정하는 국제경기를 치른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2시간 30분 가까이 경기를 치른 두 사람은 무승부로 경기를 중단하게 된다. 지금은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 권투 경기였다고 기록된다. |
반더빌트 뉴욕항 18601856년 대서양 횡단 승객선으로 건립된 반더빌트 호는 1858년 좌초되었으나 수리후 1862년 소유자인 반더빌트 제독이 해군에 제공했다. 반더빌트는 해운과 철도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재벌로 이 반더빌트호는 그의 말년에 야심차게 출범시킨 대서양 횡단용 증기선이었다. 이 배는 측면에 물래방아같은 외륜을 가동해 추력을 생성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사업가 반더빌트는 반더빌트 제독이 되어 국가에 이 배를 헌납한 것이다. | 뉴욕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파리, 런던에서처럼 뉴욕에도 삽화를 부각시킨 신문이 1859년 창립되었다. 그러나 사진의 발전으로 1864년 문을 닫고 Demorest New York Illustrated News로 바뀐다. 후자는 커버하는 뉴스의 폭이나 어조가 더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어쨌든 19세기 중반에 나온 원조 신문은 항구도시 뉴욕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하는 미국의 삶을 전달하는 중요 매체였다. 사진은 배가 붐비는 항구 모습을 배경으로 한 신문의 표지 |
1868 이디오피아 원정 지도19세기 아프리카의 제국 아비시니아(오늘날의 이디오피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 위험에 유럽 제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반응이 없자 급기야 영국의 선교사를 투옥하며 시선을 끈다. 이에 대영제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징벌 원정에 나서는데 영국인과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길도 없는 산악 지대를 탐험하며 수도까지 들어가 인질을 구한다. 대영제국의 군사력을 보여준 사례로 회자된다. 지도는 당시 군대가 이동한 길을 보여준다. | 1866 뉴캐슬 보트경주대회영국에서 보트 경주가 시작된 것은 1829년이었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이 시작했고 이후 널리 퍼져가서 1866년에는 북쪽의 뉴캐슬에서 국제 대회가 열렸다. 뉴욕 체육인들이 주선한 대회로 당시 영국인 헨리 켈리와 미국인 제임스 해밀이 국가대표로 경쟁하게 되자 사람들이 강변과 다리, 배를 타고 관람하게 된다. 결국 영국인이 우승하면서 원조의 힘을 과시한 바 있다. |
1864 클리프턴 현수교영국 브리스톨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에이번 강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세우고 싶었으나 돌다리 기술만 있던 시기에는 불가능했다. 1864년 드디어 연철 체인을 이용한 현수교가 완성되었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기술발전이 이룬 쾌거였다. 운영을 위해 초창기부터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 통행료를 받곤 했으나 자동차 통행이 늘어난 1920년대부터야 수입이 늘어났다고 한다. | 1861 퀸빅토리아 기차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은 테크놀로지와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고 누린 부부는 격에 맞게 왕실전용 기차를 만들게 했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 등 여러 지역으로 갈 때 그 기차를 사용하곤 했다. 안에는 여왕 전용 라운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곤 했다. 1861년 한 신문이 그 라운지를 그린 삽화와 설명을 싣고 있다. |
1864 글래스고-1글래스고(Glasgow)는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로 오늘날 영국 도시 중 1인당 GDP가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 오래전부터 영국 해양무역의 거점이었고 산업혁명 시대의 주요 도시로 한때 영국 제2의 도시였다. 19세기 인구의 증가로 도시가 팽창하는데 유럽에서 인구 백만 명에 도달한 최초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당시 공장 늘고 한 가운데의 클라이드 강변으로 운송선이 즐비한 글래스고의 조감도 풍경이다. | 1863 기계식 우편 배송19세기 후반 런던의 늘어난 우편물을 빠르게 배달하기 위해 한 회사가 지하 기계 시설로 배송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영국의 저명인사가 주주로 참여한 이 회사는 기술 개발 끝에 캡슐형 운반선을 제작했고 1863년 드디어 우체국에서 인근 지역에 약 600미터의 노선을 만들어 배송을 시작했다. 기계 문명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크게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1874년 이 시스템은 중단된다. |
1860 리켓 증기 자동차1860년 영국의 토마스 리켓은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를 제작한다. 3개의 바퀴에 석탄 보일러와 엔진을 단 차로 당시 최고로 낼 수 있는 속도는 시간당 19마일이었다고 한다. 말 대신에 기계가 이끄는 차였기에 뒤 좌석에는 보일러공이 앉아야 했고 앞쪽에 탄 2-3명의 승객중 1명은 오늘날의 운전자처럼 기계 장치를 작동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 1850 런던 브리지 역1831년 런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템즈강 위의 오래된 석조 다리인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 대신에 아치형 구조의 넓은 다리가 들어선다. 이어서 1836년에는 런던 브리지 남쪽에 기차역 런던 브리지 역이 들어서는데 이용객이 늘고 수입성이 높아지자 연결 철도가 늘어났고 이어서 역사도 확장된다. 이동하기 위해 역사 주변에 모여든 시민의 수가 늘면서 번잡한 근대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
1845 런던 파노라마‘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런던을 소개하는 그림지도를 발간하기도 했다. 구매자 대부분이 런던에 있는 노동자와 신흥 중산층이었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면모를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지도에는 템즈강을 하단에 두고 도시 여러 곳을 소개하는데 맨 왼쪽 다리는 복스홀 다리이며 그 오른쪽은 올드 웨스트민스터 다리이다. 이외에도 트라팔가 광장, 서머셋 하우스 등 런던의 주요 건물도 표시하고 있다. | 1844 킹스타운 대기철도아일랜드의 킹스타운과 달키를 연결하는 철도가 1844년 개통되는데 세계 최초의 상업철도이다. 파이프를 이용한 진공 전력이 사용되었으며 최대 시속 40마일 정도의 속도로 매일 8시부터 6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곤 했다. 1844년 1월 6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는 대기철도 기술과 킹스타운의 환영 인파, 그리고 도시의 여러 시설을 소개하는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
1851 런던 엑스포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이 주도한 1851년 만국박람회는 유럽 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엑스포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된다. 당대 영국의 유명 인사 대부분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것으로 만국박람회 행사가 열린 크리스탈 팰리스가 유리와 철골 구조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가운데 행사장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많은 인파가 보인다. | 1842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1842년 런던에서 창간된 신문이다. 신문이 세상의 변화와 사건을 소개하는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하자 한 언론인이 삽화를 많이 넣은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사진은 5월 11일 창간호 1면으로 상단에 세인트 폴 성당이 높이 보이는 런던의 풍경이 실렸고 하단에는 대화재로 불탄 독일 함부르크를 보여주는 그림을 넣었다. 5월 5일 발발한 화재 소식이 1주일 만에 런던에 소개되고 있었다. |
일러스트레이션-1900 파리만국박람회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전 세계에서 온 기술, 문화와 예술이 경쟁하던 장이었다. 디젤 엔진과 에스컬레이터 기술 등 새로운 기술이 이 해에 소개되었다. 청나라 말기였던 중국도 이 행사에 참가하는데 <일러스트레이션> 지가 중국의 이국적 문물과 문화를 포착했다. 이 신문 6월 23일자에 실린 삽화는 번잡한 만국박람회 현장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청나라 복식의 중국인을 묘사하고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1846-파리풍경발간 4년차에 들어선 L’illustration 의 표지이다. 상단의 좌우로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에 파리 센느 강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모습은 파리의 건물과 길을 결합한 것으로 몽마르트르부터 카푸친 등 여러 도로의 건물을 더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씩 수정을 더하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이 신문의 얼굴처럼 사용되었다. |
일러스트레이션-1843-노동자산업화 시대의 프랑스에서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삽화신문 ‘일러스트레이션’도 공장 노동자 문제를 알리는데 일조한다.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에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싣고 이렇게 설명을 붙인다. “공장에는 12-16세 39명의 아이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2명만이 여자아이다....이들의 노동덕분에 가정에 빵을 가져갈 수 있다...그러나 노동여건은 끔찍하다.” | 일러스트레이션 신문19세기 파리는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 시대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국내변화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국의 활약상을 알리는 언론매체도 점차 증가하는데 특히 삽화를 주로 싣는 매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L’illustration 은 프랑스 최초로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다양한 계층을 위해 1843년 설립된 주간 신문으로 뉴스보다 삽화를 많이 실어 누구든지 쉽게 파악하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1847년판 이 신문의 커버로 왼쪽에 파리의 대로와 오른쪽에 센느강의 모습을 항공뷰로 그리고 있다. |
경성역 1924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1899년 개통되었고 이듬해 경성역까지 이어졌다. 당시 경성역은 지금의 서대문역이었으나 1923년경 남대문역을 확장하며 경성역이라 명명했다. 조선총독부는 새 경성역 건물을 도쿄역과 유사하게 지으려다 예산부족으로 규모를 줄였으나 근대식 건물에 레스토랑과 다방, 호텔을 품은 명소로 만들었다. 이 역은 1947년 이후 현재의 서울역이 되었다. | 리빅과 궁궐리빅사의 한국 소개는 제물포에 그치지 않는다. 사자춤을 즐기는 사람들,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한 서울의 거리를 소개한 카드도 있고 황제가 사는 왕궁을 담은 카드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국에 온 적이 없는 듯 건물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다소 허구적이고 중국이나 타문화권에 가까워 보인다. |
리빅 파리작고 단단한 종이에 풍경이나 사람 이미지를 담은 수집용 카드는 19세기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다. 담배회사부터 차 회사, 야구팀까지 수집용 카드를 활용하며 광고효과를 노리곤 했다. 영국의 Liebig도 1870년대 카드를 제작하며 세계 도시, 역사, 인물 등을 담은 카드세트를 유통시켰다. 사진은 리빅 상품과 파리 도로를 포장하는 근로자를 소개하는 카드 | 제물포와 리빅영국의 Liebig 사가 19세기 고기추출물을 불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스프래드로 판매하자 유럽 중산층의 필수품이 되었다. 사업이 성공하자 어린이용 카드, 게임, 달력 등에 당시 중산층이 궁금해 하던 외국의 풍경과 상품이미지를 담아 광고하곤 했다. 사진은 한국 제물포의 한국인과 풍경을 담은 리빅사 카드. |
파괴된 인천 1950제물포에서 항구도시 인천으로 성장하며 인구가 늘고 빠르게 근대화를 겪는다. 2만명이 채되지 않던 1890년대와 달리 1950년경이면 20만명이 넘을 정도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조계지에 불과하던 제물포 인근에 집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인근 야산의 언덕까지 빼곡 하게 들어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항구의 기간시설을 비롯해 여러 곳이 파괴된다. | 제물포 전투에서 파괴된 러시아 순양함 1904러시아 제국의 순양함 ‘바랴그’의 외양은 대단했다. 길이 130미터에 달하는 위용에도 불구하고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에 정박중이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는다. 일본군함에 포위된 채 싸우다 패배를 앞두고 스스로 침몰시킨다. 일본은 이 배를 인양해서 수리한 후 훈련함으로 쓰다가 1차세계대전 중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군이 된 후 러시아로 반환했다. 르 파트리오트 일뤼스트레 2월 21일자에 실린 사진 |
제물포에 내리는 일본군 1904러일전쟁은 외국에서 제물포 전쟁으로 불린다. 일본군이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하자 외국인 기자들은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수가 해외의 신문사로 보내졌다. 여러 제국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시기에 이 전쟁의 승자가 누가될지가 관심사였다. 당시 일본군이 말과 무기를 싣 고 항구에 내리는 사진이 여럿 남아있다. | 제물포-18901893년 제물포에 외국인 거류지를 만드는 조계조약이 체결된 지 7년이 지난 모습이다. 외국인이 오가기 시작했고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 외국의 해양 도시를 보는 듯하다. 1888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1890년 일본18은행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호텔과 은행을 이용할 정도의 인구가 이미 거주하거나 방문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
제물포 일본군1904-1905년 일어난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두고 주도권을 다툰 사건이었다. 2월 일본군이 제물포로 들어왔고 본격적으로 러일전쟁이 전개된다. 사진은 당시 제물포에 있던 외국 신문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말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정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전쟁에서 일본이 이긴후 제물포는 일본 주도하에 빠르게 근대화되었다. 일본인은 제물포를 진센(Jinsen)이라고 불렀다. | 제물포 지도 1950년대일제강점기 일본이 주도한 근대화 과정 속에는 한반도의 정교한 지도 제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일본이 만든 제물포의 지도로 위쪽의 섬은 월미도이고 아래쪽에 분홍색으로 표시된 곳이 일본이 만든 근대식 항구이다. 이 지도에는 자유공원의 전망대, 영국총영사관, 세관이 표시되어 있고 항구 바로 앞바다의 수심이 썰물시에 14피트라고 명시되어 있다. 일본인이 제물포를 부르던 명칭 진센(Jinsen)이 지도에 보인다. |
제물포의 초가집제물포는 오늘날 인천의 중구 일대를 부르던 명칭이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으나 인천조계조약에 의거해 1883년경 조계지가 설치되어 외국인의 활동과 거주가 허용된다. 조선인과 외국인의 거주지를 구분했으며 조선인 마을은 사진처럼 초가집이 주를 이루었고 외국인이 거주하는 조계지는 호텔, 사무소, 클럽 등 서양문화를 수용한 신도시로 계획되었다. 이후 해외 언론에 Chemulpo 라는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04년 1월 9일 미국의 타코마 타임즈에 실린 제물포 마을 사진. | 제물포 1904한강 어귀에 위치한 제물포(오늘날의 인천)는 원래 작은 마을이었다. 서울과 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외세가 몰려올 때 개항장이 되었고 외국인이 거주하는 조계지가 만들어진다. 1900년에는 서울로 가는 철도가 놓여지는데 바로 경인선이다. 사진은 1904년 러일전쟁 직전인 1월 9일 미국의 타코마 타임즈에 실린 제물포 항구의 사진으로 무역선이 오가는 항구를 보여준다. |
상하이 번드상하이의 국제지구는 주로 와이탄 즉 영어로 번드라고 불리는 지역에 형성되었다. 황포강의 제방을 따라 형성되었기에 제방을 의미하는 ‘번드(bund)’로 불린 것이다. 서양에서 온 여러 국가의 무역회사와 은행, 호텔과 외국인 전용 클럽, 언론사 등 위치했던 1930년대 번드는 상항이의 전성기를 상징했다. 강변을 따라 서양식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걸으며 화려한 ‘동양의 파리’를 경험할 수 있었기에 아시아의 엘리트들이 모여들던 곳이기도 했다. | 홍콩 1912잘 알려진 대로 홍콩은 중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19세기 중반 영국에 임대되었던 도시이다. 이후 홍콩항은 아시아의 주요 무역항으로 부상했으며 외국인 거주지가 확대되자 서양문화가 수입되어 중국과 영국의 문화가 혼합된 홍콩 특유의 근대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수많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된다. |
마카오 풍경포르투갈이 16세기에 중국에 은화를 주고 임대한 도시이다. 이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무역기지이자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와 도미니크회의 선교 거점이 된다. 마카오의 항구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일본의 은 등 아시아의 무역품이 배에 실려 여러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이 접수한 홍콩이 새로운 무역기지로 부상한 이후 서서히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1999년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사진은 19세기 무역항 마카오의 풍경을 그린 무명 작가의 그림. | 상하이 지도상하이 시의회가 미국인에게 의뢰하여 1935년 만든 이 지도는 일제 강점기 여러 국가의 시민들이 정착한 국제적인 도시를 보여준다. 황포강에 동서양의 배가 드나들고 서양식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운동장부터 외국의 은행, 호텔, 교회 등이 들어서 코스모폴리탄 문화를 만들어갔다. 무역과 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밤에도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며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곤 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
시드니 뮤지엄‘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드니 뮤지엄은 영국에서 온 첫 주지사의 관사 터에 설립되었다. 그 터에서 발굴한 건물의 잔해들을 세우고, 원주민과의 접촉, 갈등, 동화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데 이 뮤지엄은 상업용으로 62층에 달하는 고밀도 개발의 일부이다. 금싸라기 같은 땅을 활용하면서 역사도 지키려는 호주식 개발을 보여준다. | Kuala Lumpur19세기 광산 도시로 개발된 도시 쿠알라 룸푸르는 중국인 노동자와 현지인, 그리고 인도 등 인근에서 이주한 이슬람교도가 살기 시작했고 여기에 영국인이 들어와 근대도시로 변모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도시로 갈등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에 따라 폭동과 반란을 자주 겪곤 했다. 사진은 가장 오래된 시장 광장. |
Saigon자딘이라고 불리던 작은 마을이 프랑스 점령지가 되자 사이공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서구식 도시로 바뀌면서 성당, 오페라하우스 등 여러 시설이 들어섰고 유럽문화가 도시 곳곳에 퍼지자 ‘동양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호치민이 이끄는 사회주의 공화국이 1976년 베트남을 통일하자 영웅의 이름을 따서 ‘호치민 시티’로 변경되었다. 사진은 프랑스 점령지 시절의 사이공. | Alexandria map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점령지마다 새 도시를 만들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효율적으로 도시를 운영하도록 격자무늬 방식의 도로를 빼고 구역을 지정하여 적절하게 인구를 배치했다. 지금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가 유일하게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데 고대 알렉산드리아에는 이집트인, 그리스인, 유대인 등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고 한다. |
Batavia 지도 1681인도네시아가 유럽의 통치하에 있던 300년 동안 자카르타는 바타비아라고 불렸다. 점령자 네덜란드의 라인강에 있던 바타비아 섬의 이름이 동원된 것이다.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곳에 무역기지를 건립하고 인도네시아인이 거주할 수 없는 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되면 유럽인, 중국인, 원주민 등이 어울려 사는 무역항이자 국제도시가 되었고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함께 자카르타로 개명된다. | 와인 열풍미국에서 포도를 들여다가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때가 일제 강점기였다. 이후 국내에서도 조금씩 와인이 생산되었지만 문화 차이로 크게 산업이 발전하지는 못했고 1980년대 되어서야 어느 정도 국산 와인이 확산되었다. 지금은 가게마다 국산 와인을 보기 어렵고 수입 와인이 벽을 가득채운다. |
동성로의 밤대구의 동성로는 대구 읍성의 동쪽에 위치해서 동성로라고 불렸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최고의 상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대구의 중심상권이라 새로운 트랜드가 나타나면 곧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길이 걷기 좋게 만들어져 있고 주야로 오가는 손님들을 위해 만든 광장에서 갖가지 공연을 볼 수 있다. | 아트랜드한 예술가가 자녀들과 함께 점토로 동식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재미를 느낀 작가는 그 결과물을 미술관으로 옮겨 다른 아이들과 계속 동식물을 만들어 추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만드는 환상적인 세계는 ‘아트랜드’라고 불리며 더 많은 아이들을 초대하고 있다. 북서울미술관의 아트랜드. |
이모티콘 예술말을 축약해서 쓰는 습관이 점점 이모티콘 사용으로 바뀌고 있다. 얼굴표정부터 각종 시설과 활동을 작은 형태로 만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이어붙여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건 마치 오래전 상형문자를 만들던 습관이 되살아난 것 같다. 뉴욕의 한 미술관도 이러한 이미티콘을 수집할 정도로 현대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 공원 화장실남녀가 구분되고 손을 씻는 세면대와 일을 보는 변기가 같은 공간에 융합되기까지 화장실은 오랜 역사를 거쳤다.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던 로마시대, 청결을 강조한 중세, 감염의 공포로 공중목욕탕이 사라진 18세기, 중산층에 화장실이 보급된 19세기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오늘날 변기가 흰색으로 고착된 것이나 유럽과 미국에 공중화장실이 거의 사라진 것 역시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온도와 배수생명체라면 음식을 섭취하고 가스를 배출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스는 온도를 가지 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한 예술가가 온도의 차이를 색의 차이로 보여주는 카메라로 찍은 영상과 배수관 파이프를 가지고 작업을 만들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과 확고히 자리잡은 파이프의 대조 속에서 괜히 살아있다는 것이 미안해진다. | 용기미국에서 유학한 한 젊은이가 아픈 몸과 마음을 달래려 제주 해안가 마을에 잠시 터를 마련했다. 매일 바다에 나가 산책하며 만난 사람들과 자연 속에서 터득한 지혜. 바로 천천히 사는 것의 가치 그러나 그 가치를 실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
과수원 창고 카페과수원에서 귤을 수확한 후 크기를 선별하고 포장해서 농협으로 보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귤 농장마다 창고가 하나씩 생겼었다. 제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을 쌓아 시멘트를 바른 창고가 어느 사이 카페로 변신하고 여행객을 반긴다. 새로운 감성을 파는 시대에 창고의 가치가 달라졌다. | 농가 영화 상영체험의 시대에 영화도 습관적인 영화관이 아니라 독특한 곳을 찾아간다. 제주의 한 농가에서 작은 영화 상영 행사가 열렸다. 그 농가에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고 4.3때 남편을 잃고 한 많은 생을 살다가 간 그 할머니의 삶을 통해 역사와 기억 그리고 개인의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며 시간을 넘는 공감대를 이끌었다. |
플라스틱 제로 운동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제로 쓰레기’운동이 언급된 이후 1990년대에는 리사이클링 운동이 전개되었다. 2001년에는 ‘제로 쓰레기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며 2012년 Beth Terry가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바다 새에 충격을 받고 <플라스틱 프리: 나는 어떻게 플라스틱 습관을 버렸나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나>라는 책을 발표하며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어린이들이 그린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에 대한 그림. |